나는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결혼을 재고했을거야!!"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남편은 "나도 정말 몰랐어. 난 정말 아이에 관심이 없었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나니까, 자기를 닮은 딸이 너무 보고 싶어."라고 로맨티스트 같은 답변을 한다. "아들이 나오면 어떡할건데?"라고 물으면 "아..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아들이라도 좋아. 둘째부터는 입양해도 좋은데 첫째는 우리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를 두고 엄마를 닮아 꿈이 많은 아이가 되길 바란다며, 그는꿈꼬(꿈꾸는 꼬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으론 가정을 갖고 싶다는 남편의 요구를 강제로 묵살시키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말을 바꾼 것은 맞다. 하지만 말을 바꿔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고, 어찌보면 많은 사람들은 당연하게 누리는 소망이 아닌가. 나도 결혼 전의 약속을 칼같이 지키면서 살지 못할 수도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 중 하나인 종족번식의 욕구를 갖는 것을 어떻게 탓하기만 할 수 있을까.
나는 슬프고 측은하고 때로는 다정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난한 집안의 어머니가 피아노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아들을 바라보며 갖는 마음이 비슷했을까. 그리고 나지막하게 내 생각을 전달했다.
미안해. 내가 도저히 여력이 안돼. 더 어린 여자랑 결혼하지 그랬어.
그러면 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런 말이 아니잖아...'라고 하며 돌아섰다.
우리의 갈등은 그렇게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DNA의 명령에 따라 꿈꼬의 모습을 그려보는 희망 섞인 남편,
조용히 남편에게 현실을 되뇌이는 나,
남편의 고요한 실망.
주변 사람들이 "아이 생각은 없어?"라고 물으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우리의 갈등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아무렇지 않게 답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갖고 싶어하는데, 제가 생각이 없어요."
"저는 생각이 있는데, 부인이 아직 공부 중이라 여건이 안돼요. 그래서 천천히 생각해보려구요."
남편은 시부모님이 미국을 방문하실 때, 절대 절대 아이 이야기만큼은 하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켰다. 시어머님은 아이를 끔찍히 원하시지만, 남편이 꿈꾸는 대로 우리가 미국에 살길 바라셨다. 내가 한국에서 이뤄놓은 많은 것을 버리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것을 아시던 어머님은, 아기를 가지려면 한국에 돌아가서 공무원 경력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셨다. 오매불망 손주를 바라시던 아버님은 어머니가 하도 입단속을 시키셔서 비행기에서 언쟁을 하실 정도였다고 한다. 여하튼 여행 기간 중엔 아버님은 아이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셨다.
조용한 갈등이 1년 정도 지속되었을 때다. 난 만 36세가 되었다.
남편의 희망찬 얼굴에 찬 물을 끼얹는 것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에 한 번 어른거리기 시작한 아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자연이 아이를 주시면 받아들여야겠다, 하는 정도의 마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박사를 마치고 새 일자리에 취업을 하면 만 38-9세 정도가 될텐데, 나이 때문에 임신이 안되면 남편에게 미안하지 않을까 싶었다. 남편은 조심스럽게 환영의 의사를 표했다. 나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박사과정이 2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렇게 2개월 정도 자연임신을 시도하다가, 일리노이 주 샴페인에 있는 친구 집에 1주일 간 방문을 했다. 친구는 임신 6개월 차에 접어들어 있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당분간 마음 편히 놀기가 어려울테니, 친구가 입덧이 끝나고 몸이 편안하다기에 요리를 해주고 수다도 떨겸 갔던것이다.
UIUC라고 불리는 명문 주립대 옆에 위치한 작은 도시 샴페인은 듣던대로 한적한 곳이었다. 샌프란시스코처럼 높고 낮은 언덕이 있는 시애틀과 달리, 일리노이 주는 커다란 평야에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대학원생과 교수가 주로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조용하고 쾌적했다. 나는 그곳에서요리와 운동을 하고 친구와 아파트 안에 있는 작은 호수를 돌고 또 돌았다.
친구는 오랫 동안 바랐던 아기를 품고 있었기에 기대감에 차 보였다. 한창 힘든 입덧이 지나간 터라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워보였다. 친구의 입덧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하던 남편은, 친구가 손 하나 까딱 하지 못하도록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친구는 가급적 아이를 미국에서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교육 경쟁에 아이를 노출시키는 것이 두렵다고, 미국에 와보니 신나게 뛰어놀며 자란 아이들이 편하게 대학가고 취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부럽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라면 아이가 두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될테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양육을 원하는 내 남편이 생각난 나는, 쓸데없이 친구에게 방어적으로 굴기도 했다.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 중 이중언어를 완벽하게 하는 사람 많지 않아." "한국에서 자란다고 꼭 영어유치원 다니고 대치동 학원 다니고 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우리도 그렇게 안 컸잖아." "여기 데이케어도 엄청 비싸고, 좋은 교육 시키려면 부모가 드라이빙이며 학교 봉사활동이며 부담이 엄청나." 등등.
하지만 친구는 아이에게 편안하고 좋은 환경을 주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부모에게 부과되는 부담을 감당하겠다는 태도였다. 아이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가족의 미래를 반짝이는 눈으로 그리는 친구가 부러웠다.
저런 마음이어야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아파트 공동시설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와 친구와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왜 이렇게 너 기력이 없어? 무슨 일 있는거야?" 그래서 친구에게 털어 놓았다. 아이를 두고 행복해하는 그녀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오랜 기간 남편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마음을 모른 채 하다가, 최근 내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는데 이러다가 아이를 갖게 될까봐 두렵다고. 아이 낳고 몸조리 하고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면 취업 시장에 나갈 때 40대가 될텐데, 한국에서의 경력을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나를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지 두렵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한참 듣고나서, 친구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도 결혼하고 5년이 넘도록 아이 생각 없었잖아. 그러다가 뒤늦게 아이가 갖고 싶어져서 노력을 하고 병원도 다니고. 좀 더 빨리 시작했으면 더 편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갖고 싶다는 마음이 없을 때 억지로 갖고 싶진 않았어. 나중에 고생을 했어도 난 그 5년 동안 아이 안 가진 것에 대해서 후회한 적 없어. 지금처럼 환영해주지도 못했을 거고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삶에 너무너무 큰 영향을 미치잖아. 이렇게 등 떠밀리듯이 임신 시도하는 거 내 눈엔 너에게도 아이에게도 안 좋아보여. 하지마!
너 지금 정말 이상해. 내가 20년간 본 것 중 가장 우울해보여. 너희 남편은 너 이렇게 초췌한 게 안 보인대니??? 그렇게 아기가 중요하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남편의 소망을 이뤄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오랜 시간 느끼다가, 어렵사리 남편의 뜻에 동조하고 나서도, 내가 감내해야 할 미래가 두렵고 또 아이를 바라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 어느 순간부터 숨을 쉬는 것이 답답했었다.
그렇찮아도 학교 생활이 편치 않던 나였다. 언어가 부족해서, 기민함이 떨어져서 좀처럼 성과가 따라주지 않는데, 나를 계속해서 채찍질하는 일이 지겹고 버거웠다. 거기에다가 삼신할미의 뜻에 따라 생길지도 모르는 아이의 불확실성이 더해지면서 깊이 침잠하게 되었다보다.
왜 이렇게 삶이 무거울까.
친구는, 하루에도 몇 번씩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내가 걱정 된다며, 내 상태를 남편에게 꼭 꼭 말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