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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an 10. 2024

5. 미국이야 아이야, 하나만 선택해.

샴페인 시의 친구 남편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우리 대화에 합류했다. 내 친구는 내 친구 답게 '얘가 죽어간다'며 내 역정을 들었고, 한참을 듣던 그는 나에게 무릎을 탁 칠 만한 조언을 해주었다.


남편분이 화술이 참 좋으신 것 같아요. 특히 벨뷰 님이 마음이 약한 걸 정확히 아셔서 그 부분을 공략하시니까... 개별 아젠다 별로 협의를 하면 남편 분 뜻대로 따라가다 계속 우울해지실 것 같아요. 그냥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하면 안돼요? 미국에 사는 거랑 아이를 낳는 것 중에서?





세상에 마상에!

그렇게 좋은 방법이?



난 법학자이기 때문에 저렇게 다른 문제를 엮는 것은 '부당 결부 금지의 원칙'에 따라 옳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서로 완전히 무관한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낳을 때엔 친정 엄마가 가까운 곳에서 낳는 것이 최고다. 여동생은 이미 3년 전에 아이를 낳아 육아 선배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는 내 직장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보장하는 이다. 고령출산의 위험을 고려할 때 내가 잘 아는 환경에서 위험을 맞닥뜨리는 것이, 의료보험도 의사도 믿기 어려운 미국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아이가 정 낳고 싶다면 난 한국에서 낳아서 기르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하겠어.' 이렇게 말하는 게 전혀 무리일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임신 6개월이 된 친구 부부의 미래를 축복하고 시애틀에 돌아왔다. 남편의 반응이 너무 궁금해서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을 앉혀놓고 내 입장을 설명했다.


복직을 결정하기까지 2개월 정도 남았는데, 만약 아이를 정말 갖고 싶다면 난 한국에 가서 내 커리어를 되찾고 가족의 지원과 사랑을 받으면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미국에서 커리어를 새로 구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딱히 원하지도 않는 출산까지 하는 너무나 감정적 부담이 크고,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남편은 예상한 대로 매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2년 간 힘들게 미국과 아이를 둘 다 설득시켰는데, 갑자기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니 큰 걸 잃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남편: 아니야, 아이는 그렇게 당장 원하는 게 아니라니까. 우리 나이 생각하면 자연적으로 임신이 될 확률이 낮으니까 그냥 시도만 해보자는 것 뿐이었잖아. 당장 2개월 후에 복직이라니, 그건 너무 갑작스러워.

: 아이도 갑작스럽게 생길 수도 있어. 그러면 난 2년 정도는 임신, 출산, 몸조리 등으로 엄청 애매해져. 그리고 우는 아기를 두고 구직을 하는 것도 사실 잘 상상이 안돼. 자긴 다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난 그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게 너무 두려워.

남편: 그치만 당장 2개월 후 복직은..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닌데..

: 지금 시기를 놓치면 난 복직을 못할 가능성이 높아. 이미 우리 부처에서 3년씩이나 휴직을 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거든.

남편: 내가 당장 한국에 가면 우리는 소득이 반으로 줄게 될 거야. 내가 한 2년 정도만 시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스타트업도 자리를 잡고...

나: 자기가 시간이 필요하면 한 동안은 한국, 미국을 왔다갔다 해도 난 괜찮아. 그리고 소득이 줄어도 내가 벌테니까 그것도 괜찮아.

남편: 나 한국 가면 정말 불행해질 것 같아.. 자긴 복직하면 사람들 만나고 바빠질테고 난 방치될텐데.. 그러면 내 불행을 자기가 책임져줄거야?

나: 내가 지금 미국에서 불행한 것도 자기가 책임져줄 수 없잖아. 자기 행복은 자기가 어느 정도 책임질 수밖에 없어. 당연히 나만 믿고 따라오는 거니까 내가 최대한 배려하고, 또 아이 엄마가 되면 가정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애.

남편: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돼...?

: 응....




남편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이내 꽤 가벼워진 얼굴로 내게 답을 주었다. 왠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미국이지!





: 당... 당연히 미국이야? 미국에 사는 게 그렇게 중요해?

남편: 응....

: 왜? 아이보다 더??

남편: 아이는 생길지 안생길지 모르는 거잖아. 그리고 난 아이보다 우리의 삶이 더 소중해. 미국에서 하이킹 다니고 집에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난 이게 더 행복해. 그리고 자기가 졸업하고 취업해서 직장 동료가 생기면 분명히 지금보다 즐거워할거야!

나: 그러면 이제부터 피임하고 아이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거야?

남편: 응, 그렇게 할게.







생각보다 너무 흔쾌한(?) 답변에 다소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뭐지? 겨우 그 정도 마음으로 아이를 갖자고 한 건가? 남편이 아이의 모습을 그릴 때의 그 순수한 눈빛, 크나큰 행복, 그건 분명 진짜인 것 같았는데.


그래도 당장의 원거리 생활이나 장기적 한국행을 감수할 만큼 큰 소망은 아니었나보다.


난 왠지 남편이 아이를 선택할 걸로 생각해서 미국 생활을 어떻게 정리할지, 돌아가서 학위논문을 어떻게 할지 이것 저것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복직을 하지 않는 것이 확정되면서 좀 슬픈 마음이 들었다.


다시 끝없는 전쟁과 자괴감으로의 복귀구나.





그 후 가끔씩 억울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당장 한국행과 아이 중 하나 만 결정하라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자기에게 거주지와 아이는 서로 다른 문제인데 하나를 억지로 희생하라고 하니까 너무 힘들었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약함'을 핑계로 들었다.


"미안해. 내가 어리고 팔팔해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지금은 가족의 도움 없이, 육아휴직 같은 제도적 안전장치 없이 미국에서 덩그러니 아이를 낳고 내 불확실한 미래를 계속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 너무 두려워..." 


남편은 특유의 이상주의로 나를 북돋아 주려했다. "자기는 분명히 잘 될거야! 꿈꾸는 다락방을 생각해봐. 꿈을 향해 내려가야 한다니까. 난 몇 년 후의 자기 모습이 보여. AI 전문가로 인정 받으며 신나게 일하는 모습이...."



말리지 말자, 말려선 안 된다.



샴페인의 친구 남편의 말을 되뇌였다. 내 커리어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이상주의'와 '왜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려고 하느냐'고 내 열심DNA를 자극하는 남편.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귀여운 아기가 보고싶을 뿐이야...'라며 내 죄책감DNA를 자극하는 남편. 그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꿋꿋이 내 입장을 견지했다.


난 둘 다는 못해주니, 둘 중 하나만 택하라.




결국 남편은 몇 번의 투정 끝에 깨끗이 '미국'을 택했다. 우리는 다시 피임을 시작했고, 난 하늘을 날 듯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에서 온 RA 오퍼를 받아들였다. 한국 정부에 복직할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몇 달 간 들고 있던 원고를 신속하게 마무리해서 최초로 법학 저널(law review)에 싣는 쾌거를 거두었다.


유학 생활은 여전히 팍팍했지만, 임신출산의 불확실성이 걷히고나니 그나마 견딜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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