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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an 12. 2024

6. 남편의 고마운 침묵

그리고 조금 나아진 유학 생활

남편과 극적 협상이 성사된 것이 2022년 8월이었다.  

남편은 미국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한 번 더 확인하였고, 나는 복직을 하지 않음으로써 약속을 지켰다.



조금 나아진 내 생활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에 공식적으로 소속이 되면서 연구실에 내 책상이 생겼다. 시애틀의 아름다운 호수와 푸른 나무숲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3층이었다. 신선한 드립커피와 에스프레소를 언제나 무료로 마실 수 있고, 내가 예약할 수 있는 최신식 회의실이 넘쳐났다. 로스쿨 도서관 지하실의 골방을 연구실로 쓰던 때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매년 3~4명의 PhD 학생이 입학하는 로스쿨과 비교했을 때 140명의 박사과정 학생이 입학하는 이 곳은 당연히 학생의 다양성과 자원의 규모 측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로스쿨에서 AI Safety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지만, 여기에선 이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에서 교수님과 학생은 운명 공동체다. 학생들이 잘 되면 교수가 잘 되는 것이기에, 교수님들은 학생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함께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로스쿨에서는 교수가 학생들로부터 얻을 것이 별로 없다. 1인 저자로 쓴 논문만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컴퓨터 사이언스에선 학생 6명과 교수 3명이 공동저자로 들어가는 논문도 좋은 성과로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에선 '글 잘 쓰고 연구 잘하는 학생집단'을 구성해놓으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글쓰고 Google fellowship 등 외부 장학금을 받으며 알아서 성과가 나온다.


가장 행복했던  나를 필요로 하는 연구자들(교수, 학생들)을 금방 만난 것이다. 우리 연구실이 아니더라도 나의 존재가 알려진 후에 법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나와 미팅을 잡고 함께 연구를 하고 싶어했다. 나는 코딩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컴퓨터 사이언스 페이퍼를 쓰는 데에 기여할 수 없을 줄로 알았는데, 생각보다 코딩 외의 작업 (연구질문 설정, 관련 문헌 탐색, 정성적 연구, 서베이 등)에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나도 어영부영 Github 등을 쓸 줄 알게 되었고, 간단한 웹사이트를 만드는 정도의 코딩은 하게 되었다. 그들 덕분에 AI 연구동향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졌다. 어떤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글을 쓰는지, 이 용어가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 등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매운맛은 있었다. 극도로 신중한 법학적 글쓰기를 하는 나는, 자신감 넘치고 명료한 컴퓨터 사이언스식 페이퍼를 쓰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동료들로부터 좋은 연구라고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컨퍼런스에서 고배를 마셨다. 컴퓨터 사이언스라기엔 너무 법정책학적이고, 법학 페이퍼라기엔 너무 기술적인 내 연구를 이해할 수 있는 리뷰어도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척척 억셉트를 받는 것을 보고 내심 나도 좋은 성과가 나오리라 기대했기에 실망이 컸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내 페이퍼를 완전히 갈아엎지 않고서는 어떻게 개선해야 좋을지 잘 알수가 없었다.


이제는 리젝 이메일을 하도 많이 받아서 마상을 조금 덜 입는 정도이다. 여전히 매일 헤매고 좌절하고 있다. 며칠 후에 꽤 문턱이 높은 컨퍼런스에 2개의 페이퍼를 제출할 예정인데, 과연 좋은 소식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남편의 신의


남편은 약속을 지켰다. 예전에 지나가다가 뛰어가는 아이를 보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저렇게 건강한 아이를 가진 사람은 참 좋겠다..." 같은 식의 말을 습관처럼 하던 사람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노래를 부르던 '꿈꼬~ 꿈꼬~'도 더 이상 우리 화제로 등장하지 않았다.


아예 아기를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는 말도 가끔 했다. 나중에 듣고보니 시부모님께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우린 너무 사느라 바빠서 아이 낳을 일이 없을 것 같애. 그러니 손주는 기대하지 마세요."


시아버님은 노발대발하셨지만 우리 사정을 잘 아는 시어머님이 편을 들어주셨단다. 시어머님은 큰 아들을 아주 예뻐하시는데도 우리가 결혼할 때부터 우리 엄마에게 "아들은 한국에 오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남편이 한국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어머님이 공유하고 계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시부모님은 손주를 원하실까? 우리 엄마는 내게 아이를 막 바라진 않으시는데, 다른 가정은 친정과 시댁 모두가 아이를 바랄까? 은퇴하실 나이가 되면 손주가 보고 싶으신 걸까? 자식세대가 본인들이 느낀 기쁨을 누리길 바라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님은 우리가 공식 딩크부부이던 상견례 때부터 내게 "손주 하나 낳아주면 참 좋겠는데~ 내가 애를 좋아하거든~"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남편에게 '미국과 아이' 중 고르라고 했던 것이 유효한 전략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아이 대신 거주지를 우선시하기로 결정했으니 "부인이 너무 싫어해서/바빠서 아기는 어려워. 미안해 엄마아빠." 이런 식의 화법이 안나온 게 아닌가 싶다.





남편은 왜 그렇게 아기를 바랐을까


남편은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아이의 귀여움에 눈이 멀어서 나의 우울함은 보지 못했다. 샴페인 여행에서 내가 친구 부부와의 면담을 통해 내 마음상태를 확실히 알게 되고 그에게 공유한 후 그는 꽤 오래 자책을 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부터 본인이 아이를 그렇게 원하게 되었는지도 헷갈린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바닥에서 꼬물거리며 기어다니고 뛰어다니는 아이가 보였다고 한다.


남편이 말 끝마다 붙였던 "하지만 나 아기를 100프로 원하는지 확실치 않아. 갖고 싶긴 한데, 지금의 생활을 완전히 희생하는 게 무섭긴 해. 그러니까 잘 모르겠어." 같은 류의 도망치는 말들을 난 무척 싫어했었다. 분명히 아이를 갖자는 압박을 내게 하면서도 내가 불만을 얘기하면 '100%는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면서 궤변을 늘어놓았다. 100% 원하는 게 아니면 피임을 하면 될텐데, 내가 나이가 점점 들면서 임신 가능성이 현격히 줄어드는 것이 또 크게 두려운 것 같았다.


천상 F인 남편은 저항할 수 있는 유전자의 부름과, 가능성의 소멸로 인한 불안감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나보다. 그 복잡다단한 마음을 최대한 이해하고 싶었지만, T 성향이 강한 나는 그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지금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


처음으로 아기가 내게 주는 불안과 우울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가진 남편은, 자신의 애매한 바람이 나를 그렇게 숨막히게 한다면 그 바람을 확실하게 접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남편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유전자의 부름을 목도했기에, 아무리 이성으로 억누른다 해도 언젠가는 아이 타령을 시작하게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남편은 더욱 더 공고해져갔다.




특히 시험관 아기를 하는 친구를 지켜보면서 그는 마음을 더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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