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학원 이후의 삶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연구자로서 즐거움을 느끼며 내 자리를 찾았다. 완벽히 내가 원하는 직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 하는 일을 꾸준히 하다보면 길이 보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남편이 난임시술을 하지 않고 싶다고 선언하니 나 또한 마음의 짐을 덜게 되었다. 내심 남편을 위해 언젠가는 임신출산을 어떻게든 해야할 것이라고, 숙제처럼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2021~22년에는 내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었고 복직 결정의 기로에 놓여 있기도 했다. 2023년이 장밋빛이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나 스스로를 연구자라고 칭하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게 되었다. 새로 만난 지도교수와 합이 잘 맞아서 예정대로 2024년 6월에 졸업을 하기로 했다.
8월엔 동부의 어느 학교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제안받고 인터뷰를 봤다. 이 교수님은 자리를 공고하지 않고 나에게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신 거였다. 샴페인 에서 돌아와 퇴고한 Law review 논문을 보고 감동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박사후연구원이 아주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로스쿨에서 강의를 할 수 있고 컴퓨터 사이언스 학자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손쉽게 인터뷰 합격이메일을 받고 구체적인 조건을 협상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구직활동으로 바쁠 때 나는 편하게 박사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쯤이었다. 내 마음이 몽실몽실해진 것이.
하와이에서 열린 국제머신러닝학회(ICML)에 가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OpenAI와 Anthropic 사람들이 내 발표를 들으러 왔었고 서로 말이 잘 통해서 깜짝 놀랐다.
호놀룰루 시내
남편은 나보다 며칠 늦게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시애틀에서 하와이까지 비행기표가 400불 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우린 그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남편이 막판에 따라오기로 결정하면서 우린 크게 여행 준비를 못했고 남편은 초기 이틀은 내내 에어비앤비에서 나를 기다리기만 했지만, 내가 학회를 마친 후엔 호놀룰루와 마우이를 흠뻑 즐길 수 있었다. 하와이에서 먹은 포키(poke)는 미국 본토에서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 과장하면 우리 간장게장에 비견할 만한 맛이었다. 하와이 꿀이 듬뿍 들어간 아사이볼을 매일 아침으로 먹는 것도 무척 행복했다.
스노클링을 하면서 바위에서 느긋하게 이끼를 뜯어먹는 거북이와 오색빛깔 열대어를 만났다. 수영을 못하는 남편은 신기하게도 스노클링 장비를 끼더니 물개처럼 물 속을 돌아다녔다. 더할 나위 없이 날씨가 좋았고, 어디서든 맛있는 생맥주를 팔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걱정 없이(어차피 비싼 걸 안 먹었기 때문에) 3일간 계획 없이 실컷 먹고 놀면서 우리는 온전한 휴식을 맛 보았다.
그런 하와이가 불타다
우리가 마우이를 떠난 건 8월 3일. 내 기억이 맞다면 8월 7일 경에 마우이에서 대화재가 났다. 우리가 아는 거리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물에 뛰어들어 구조를 기다렸다. 불덩이들이 바람을 타고 이집 저집으로 번졌다고 했다. 마우이의 대부분의 가정주택이 목조주택인 것을 봤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지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하와이를 좋아했던 이유는, 관광지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유달리 친절했기 때문이다. 태국에 가면 종교 때문인지 사람들이 친절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우리도 하와이에서 그런 조건 없는 환대를 느꼈다. 이 사람들은 왜 여유로울까, 왜 시간을 내서 친절을 베풀까. 객으로 놀러 간 입장에선 감사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하와이 사람들이 집과 가족을 잃는 것을 충격적으로 바라보았다. GoFundMe라는 모금 사이트에 집을 잃은 마우이 가족의 사진이 넘쳐났다. 하나 같이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내가 여행정보를 얻었던 Maui Bound라는 페이스북 그룹은 '친 여행객' 대 '반 여행객' 본토민으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다.
우리도 마우이가 너무 좋아서 조금만 더 머물까 생각을 했었기에, 우리도 재해민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꼭 마우이가 아니라도 지진이나 기후변화 때문에 누구든 재해민이 될 수 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살기 어려운 지구에 후손을 남기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우이와 사랑에 빠졌던 남편이 실의에 잠겨 있는 걸 보면서, GoFundMe의 많은 가족들이 똘똘뭉쳐 열심히 살아가리라고 다짐하는 것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아이를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조카가 들려 준 마녀이야기
4살이 된 여동생의 딸이 시애틀이 놀러왔었다. 내가 유학나오기 직전 태어난 조카에게 선물만 사줄 뿐, 마음으로는 크게 챙기지 않고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서 일주일 간 시간을 지내보니 상상력이 풍부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놀라운 아이였다. 우리는 함께 시애틀에 사는 마녀 이야기를 지어내고 살을 붙여가며 재미있게 놀았다.
남편은 '아이 보기'에 재능이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을 입증하려는듯 초반부터 조카 담당을 자처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하루 만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5세 여아의 넘치는 에너지와 수다에 기가 빨리고 만 것이다. 한편 나는 본래는 여동생을 쉬게 해 줄 목적으로 조카와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조카의 매력에 푹 빠져서 내가 오히려 신나게 놀았다. 여동생은 "언니 정말 미안해. 힘들지 않아?"라고 했는데, 난 이상하게 힘들지가 않았다.
남편은 내가 조카의 눈높이에 맞출 줄 알아서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 같다고 했다. 본인은 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 '놀아주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치는데, 나는 '애처럼' 함께 놀기 때문에 아이도 재밌고 어른도 재밌다는 것이다. 결국 육아를 전담하겠다는 남편의 주장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내 육아에 조금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놀라웠다. 아이의 순수함, 창의성, 기발함. 모래와 삽만 있어도 세 시간 동안 도시를 만들며 놀 수 있는 아이. 그 아이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어느 영화나 드라마보다 재밌었다. 아이의 언어의 폭이 늘어날 수록 얼마나 많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될까. 그 애는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갈등을 겪게 될까. 이를 곁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특권이라는 걸 어릴 때는 몰랐었다.
친구의 할머님이 아들, 손자, 증손자를 보시면서 '3번의 삶을 더 살게 되었다'고 하셨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이 행복감을 가장 빨리 알아차린 건 조카였다. 조카는 자기가 존재 그 자체로 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즐거워했고,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다. 내가 여동생을 사랑하는 만큼, 나와 여동생을 조금씩 닮은 그 애가 아주 소중했다.
내가 운좋게 조카와 궁합이 잘 맞았던 것이고, 단 일주일이니 아름다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길어졌으면 나도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이 경험은 내 자신감에 도움이 되었다. 너무 오랜 기간 커리어와 공부만 좇으며 살았다보니, 아이를 낳아도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와 지내보니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내 시간과 관심과 경청과 사랑이고, 이것을 주는 것은 (커리어 상 희생은 있겠지만) 그 자체로 꽤나 즐거운 일이어서 어쩌면 생각했던 것 만큼 어렵진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수동적 yes로
우리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피임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남편도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있은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마도 언어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진행이 된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이번엔 남편의 애원이나 압박 때문은 아니었다.
남편은 곧바로 아기가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고, 나는 '우리는 더 이상 십대가 아니야.'라고 하며 웃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