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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만났던 못된 아이들

그들에겐 잘못이 없었는지도.

by 벨뷰의 정원



오늘도 벨뷰의 초록빛 나무는 더할 나위 없이 초록이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쉬림프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아이와 함께 경쾌하게 산책을 나왔다.


주제는 남편의 부모님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에게는 온통 결핍으로 얼룩진 기억이다. 내가 부모님 편을 들든 같이 욕을 하든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 구멍은 과거에 있고, 현재의 사람들은 서로 사과를 주고 받지 않으니 지금 하는 이야기는 하늘로 다 흩어질 것을 안다.


같은 내러티브를 종종 듣는 나는 이제 작은 디테일들을 수집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예를 들어 오늘은, 남편이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에버랜드에 갔고 독수리요새를 너무 좋아해서 그 날 하루 다섯 번이나 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산에도 어린이 대공원이 있었지만, 아주 어린 시절에 딱 한 번 가본 것이 전부라 롤러코스터를 타본 적이 없었단다. 독수리요새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가 롤러코스터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고.



남편: 당신은 참 운이 좋아. 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신 건 불운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부모님과 좋은 기억이 많잖아. 에버랜드도 많이 가고, 계곡도 많이 가고.

나: 계곡은 정말 많이 갔어. 100번은 간 것 같아. 엄마 말로는 아빠가 구두쇠라 계곡에 가면 돈이 안들어서 좋아했대.

남편: 그래도 아버님은 재미가 없었을텐데, 아이들을 위해서 따라가신 거잖아. 그게 희생이지.

나: 음, 아빠도 재밌어 보였는데? 다른 집 아빠들이랑 같이 맥주 마시고 수박 먹고 그랬었어.

남편: 아버님이 즐기셨다면, 그건 더더욱 좋은 거지.

나: 그렇네.



엄마는 내게 말하곤 했었다. 주말에 그렇게 다같이 놀러가면, 우리가 알아서 재밌게 잘 노니까 엄마가 편하려고 간 거였다고. 대개 엄마 친구 두세명의 가족들과 함께 였다. 모두 비슷한 때 결혼해서 우리 또래의 자녀가 있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인데, 그 여러 명의 가족이 많은 걸 준비해서 적정한 수심이 있는 계곡으로 주말마다 떠났다. 고기를 구워먹고 다슬기를 잡고 또 다슬기 탕을 끓여먹었다. 우리 차의 뒷자리에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파라솔 식탁, 벤치 셋트가 있었다. 벤치를 물가에 펴놓고 수박을 발 아래에 두곤 했다. 그러면 수박을 시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간 후에도 그 주말 여행은 계속 되었다.


우리 세 남매는 망둥이들처럼 신나게 뛰어놀았다.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책에서 어린 박완서 선생님이 개성의 자연 속에서 풀을 따고 꽃물을 먹으며 뛰어놀던 장면처럼. 우리도 그 홍천의 계곡에서 비슷하게 생동감이 넘쳤으리라.



단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은, 엄마 친구들의 아이들이 때때로 못되게 군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 동네에서 어울리던 친구들보다 훨씬 날이 서 있었다. 언제나 손해를 볼까봐 전전긍긍이었다.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인정을 받기 위해 다른 아이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도 예사였다. 맘에 안들면 상대를 때리기도 했고, 부모 앞에서는 엉엉 울면서 억울하다고 했다. 내 여동생과 남동생은 모두 그 아이들 때문에 물 속에서 빠져 죽을 뻔 한 기억을 갖고 있다. 나는 내 남동생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려 우리보다 덩치가 작았다)을 물 속에서 밟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물 속에서 목격하고, 혼비백산해서 남동생을 구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놀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했다.



재미있게 놀던 기억도 많았겠지만, 한 번 만나서 놀면 이런 일이 꼭 한 번씩은 일어났고, 그 일이 기억을 망치고 말았다.



그래서 남편이 나의 계곡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그렸을 때, 나에게는 이런 호러 드라마가 머릿 속에 먼저 떠올랐다. 내가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했음에도 엄마 친구들과의 끈끈한 관계는 꽤 오랫 동안 이어졌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집이 재정난을 겪으면서 엄마 친구들이 더더욱 소중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함께 가난했다.





내가 그 아이들과 노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했을 때, 엄마는 그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가난하고, 더 힘든 환경에서 자라고 있어서 그런 것이니 내가 사랑을 많이 줘서 그 아이들을 보듬어 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도 가난하지만 착한 아이들이 많이 있는데, 왜 그 아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못되게 굴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우리가 그렇게 부자도 아닌데 '가난하니까 이해해준다'는 건 상대를 업신여기는 태도 아닌가?



내가 그 아이들을 안볼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즈음, 엄마가 그 무리의 친구 중 한 명으로부터 크게 배신을 당하면서였다. 엄마들끼리 끊어지니, 우리는 더 볼 이유가 없었다. 세이클럽이나 싸이월드에서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마주쳤어도 못 본 척 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수 존슨(Sue Johnson)의 <Hold Me Tight>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사람은 존 벌비(John Bowlby)라는 사람의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심리상담에 적용해서 감정 집중 테라피(Emotionally Focused Therapy)를 개발해서 유명해지신 분이다.


존 벌비는 '부모의 심리적, 육체적 애착이 아이의 정서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론을 주창해서 심리학 학회에서 강제 탈퇴까지 당할 뻔 했다고 한다. 1960년대만 해도 '부모가 아이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유지해야 아이의 독립심을 키울 수 있다'가 주류 이론이었다고 한다. 수 존슨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아이에게 마음과 시간을 많이 줄 수 있는 부모가 거의 없었기에, 심리학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애착 이론을 부정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960년대 북미에서는 유아가 입원을 하면 부모가 일주일에 1시간 만 면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존 벌비는 병원에 입원한 2세 아이가 부모와 면회를 할 수 없어 겪는 아픔을 영화로 만들었고 이 영화는 심한 비판을 받고 상영금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출산을 하던 미국 병원에서는 아이와 내가 1초라도 떨어지면 큰 일 날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 60년 전과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


수 존슨은 이 이론을 더 발전시켜 '배우자 사이에서도 심리적, 육체적 애착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연구하고 입증해온 사람이다. 배우자와 애착을 잘 형성한 사람은 새로운 환경을 더 잘 받아들이고 탐구심이 높아졌으며, 불안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금세 안정을 되찾았고, 심지어 IQ도 높아졌다고 한다. 프로이드 식으로 어린 시절의 결핍이나 트라우마에 대해서 같이 탐구하는 것보다 수 존슨은 당장 상대와의 애착을 더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 어린 시절 계곡의 아이들은 해봐야 7세에서 10세 정도였다. 그 아이들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억울함'인 것 같다. 그 애들은 부모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아서, 자신의 좋은 뜻을 사람들이 알아봐주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충분히 예뻐해주지 않아서 억울해했었다. 단체를 위해서 희생할 일이 생기면 '왜 쟤가 아니고 나인지' 억울해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아이들이 불행했었구나 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 아이들은 언변이 좋고 항상 당당해보였었는데, 사실은 마음 속에 깊은 불안과 우울을 억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친구들은 자신의 세상을 살기도 버거워 보였고, 마찬가지로 세상에 억울한 것이 많았다.








우리가 자라던 시대는 존 벌비가 배척 당하던 때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8-90년대의 우리나라에서는 호랑이가 절벽에 자식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아이를 키우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불과 몇 십 년 전 주류 심리학에서 바람직하게 여겨지던 부모의 상이었다. 3세의 존 스튜어트 밀에게 수 많은 언어와 수학과 논리학을 직접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는, 요즘 관점에서는 아동학대자이다.


'좋은 부모의 상'이라는 것이 그 몇 십 년 사이에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바뀔런지. 나름대로 자리 자기에서 열심히 힘들게, 때로는 억울하지만 버티면서 살았을텐데, 아이들의 상처 앞에서 부모는 가해자가 되고 만다.


나는 시아버지를 생각하면, 없는 환경에서 어렵사리 실낱 같은 기회를 잡아가며 세상을 헤쳐나가며 살던 남자의 모습, 그리고 마음 약한 아들이 자신 만큼 생활력을 갖추지 못했을까봐 불안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유를 갈고 닦는 데에 온 관심을 보였고, 우리 시아버님은 아들이 생활력을 갖추는 데만 오로지 관심을 지니셨다. 생활력을 갖추는 것이 본인의 일생 일대의 과업이었으니, 아들에게도 같은 기준을 강요했다. 아들의 마음이나 사유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 무관심(또는 여유 없음)이 남편의 마음에 영원히 매워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아버님에게는 '나도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아니?! 그 정도 해줬으면 되었잖니?!'라는 방패막이가 남아있다. 그 방패막이의 견고함을 아는 남편은 오늘도 마음을 닫는다.


우리 엄마는 본인이 대학에서 '유아교육학'을 수강했던 것이 우리를 키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80년대의 유아교육학에서는 존 벌비나 마리아 몬테소리 처럼 '아이 중심'의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 때의 엄마의 교수님과 유아교육학을 일구어준 학자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억울하지 않았던 것은 엄마의 애착 덕분이었다.


마음에 큰 구멍을 갖고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아픔과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힘든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 거니까 네가 사랑을 주어야 해.' 라는 엄마의 말에도 일면 진실이 있는지 모른다. 나에게는 그 아이들에게 그렇게 큰 사랑을 줄 여유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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