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틀란틱>이라는 온라인 판 잡지를 읽던 중이었다.
<아틀란틱>은 꽤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갖고 있는 잡지인데, 문장이 좋고 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다. 온라인이 주된 독자층이라서인지 출판물 중심의 <뉴요커>보다 저자 기반이 넓은 느낌이다. <뉴요커>에는 정말 뉴욕에 사는 정치, 문화 비평가들이 주된 필자라면, <아틀란틱>에는 팟캐스트 운영자, 연예인 등의 기고문도 많다.
방금 읽던 글(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선물링크이다!)에는 1700년 대에 출간되던 잡지 <The Pennsylvania Review>에 대한 재밌는 기억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브라운 대학교의 미국 역사학 도서관에서 <펜실베니아 리뷰> 전권을 살펴보다가 미국 독립선언문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궁금해서 1776년 판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요리나 과학 등 여러 기사가 주욱 나온 후 뉴저지, 코네티컷 등의 주에서 헌법이 제정되었단 소식과 함께 맨 마지막에 독립선언문이 가볍게 게재되어 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이렇게 대충 다루어진 것일까 궁금해서 사서에게 문의를 해보니 "잡지의 편집 전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글은 <아틀란틱>의 편집장인 제프리 골드버그가 미국 설립 250주년 기념 특별판에 붙인 글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군사 기밀 채팅방에 실수로 초대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 글에 1776년에 쓰였다는 토마스 페인의 글을 옮겨놨는데 "From elegance they sunk to simplicity, from simplicity to folly, and from folly to voluptuousness" (우아함이 단순함으로, 단순함이 우매함으로, 우매함이 선정성으로 바뀌어 왔다) 라는 글이다. 이 리듬감과 GRE 급의 단어를 보면서, ChatGPT 이후로 이런 식의 공들인 글을 얼마나 볼 수 있게 될지 궁금해졌다.
요즘은 YouTube 플레이리스트를 반드시 2023년 이전 것인지 확인한다. 자꾸 2024년 이후 플레이리스트가 뜨면 라이브 연주를 듣거나 KBS 1FM 재즈수첩을 듣는다. AI 곡이 너무 많아서다. AI 곡의 퀄리티가 안좋아서라기 보다는, 아 이것도 AI인가, 정말 잘만들었네 하는 식으로 상념이 잦아드는 것이 싫다. 물론 뮤지션의 presense가 느껴지는 게 좋기도 하다. 언젠가는 글도 2023년 이전의 글을 찾게 되려나. 이렇게 비 AI 시절을 낭만화하는 것을 <Creativity Cutoff> 라는 개념으로 영어 글을 써볼까 오랫동안 생각만 해왔다.
좋은 글을 읽다보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빠지게 된다. 그 때야말로 진정으로 정신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순간이다.
<도둑 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에서 이런 '쉼'의 기능이 글 읽기의 중요한 역할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침략적 알고리즘'으로부터 집중력을 되찾으려면 전자기기를 완전 차단하고 '무위'의 상태로 가야 한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가볍고 편안한 글 읽기를 하거나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떨면서 우리 뇌에 적당한 일감을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독서를 잃은 적이 인생에서 세 번 있었다.
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 도저히 '여가용 책읽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책이라는 물체가 일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낙상 사고로 뇌진탕에 걸려서 시력을 잠시 잃었을 때 2주 정도 휴대폰, 책 금지령을 받았었다.
미국에 처음와서 영어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영어 읽기가 흙을 씹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바리바리 싸온 한국책조차 쳐다보기 싫던 시절이 있었다. 영어의 10배 속도로 읽히는 한글을 보면 눈물이 났다.
뇌진탕 입원 시기에 책 금지령이 풀리고 나서 가장 먼저 읽은 책은 병원 복도에 있던 <시더벤드에서 느린 왈츠를>(로버트 제임스 윌러 저)였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보다 훨씬 잘 쓰였다고 생각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순간순간 차디 찬 산소가 두 눈에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이 느낌이었어. 이게 있어야 내가 살아.
미국에서는 흙을 오래 씹다보니 결국 익숙해져서 한글과도 다시 관계를 재개했다. 머릿 속에서 '한글은 이렇게 쉽기 읽히는데!!'라는 억울함이 들지 않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다시 생활 구석구석에 잘 쓰인 글들을 빼곡이 쌓아 놓으니 한국의 거리를 쏘다니며 들렀던 독립책방에 대한 사무침이 조금은 사그러든다.
네 번째로 독서를 잃는 순간은 아마도 시력의 또는 정신의 손상이 오는 때일 것이다.
어릴 때는 "난 책, 술, 음악만 있으면 되니 얼마나 저렴하게 행복해지는 삶이냐."라고 자신하곤 했었는데, 그 때는 젊음을 값싼 것으로 치부했었다. 책도 술도 건강해야 소비할 수 있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금방이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금방이겠지. 눈에서 산소를 동글 동글 굴리는 이 놀이를 완전히 잃는 날이 오리라 생각하면 슬프다.
그래도 그 때는 그 날의 기쁨이 있을 것이다. 오디오북도 있고, 뇌파를 이용해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기계 같은 것이 생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와 대화를 나누어 줄 가족과 친구들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기를 바란다.
그 생각을 하면 <아틀란틱>을 볼 시간에 남편과 아이에게 좀 더 잘해야 한다고, 갑작스레 가족 지향적인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