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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릭 Feb 29. 2020

거기 누구냐?

<햄릿>을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든 첫 질문

Who's there?


<햄릿>은 이 짧은 대사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질문이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알게 모르게 계속 울림을 일으킨다.

처음 읽을 때는 무심코 지나치지만, 여러 번 읽다보면 첫 대사에서 자꾸만 멈춰 서게 된다.

 

우선 이 질문을 누가 누구에게 하느냐 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대사의 화자는 바나도(Barnardo)로 되어 있다. 바나도는 1막에만 등장하고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아마도 배우가 2막 이후로 등장하는 다른 인물을 맡아 연기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로젠크랜츠나 길덴스턴?)


아무튼 지금 바나도는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해 초소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현재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건 바나도가 아니고 이 질문에 대답하는 프란시스코(Francisco)라는 점. 바나도는 프란시스코와 교대하러 오는 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경계를 서고 있는 프란시스코가 다가 오는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어야 한다. 군대 경험이 없는 사람도 그 정도는 상식으로 알 수 있다. 400년 전에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이 질문은 뻔한 질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프란시스코가 이 수상한 질문을 들은 즉시 바로 잡는다.


아니, (네가) 나한테 답해라. 멈추고 정체를 밝혀라.
Nay, answer me. Stand and unfold yourself.


그제야 바나도는 그날의 암구호(임금님 만세)를 말하고, 프란시스코는 그 이상한 사람이 바나도임을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바나도는 왜 프란시스코가 거기 있을 걸 알았을 텐데 왜 그런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던 걸까?


이유는 잠시 후 호레이쇼(Horatio)와 마셀러스(Marcellus)가 등장하고 드러난다. 그건 바로 며칠 전 부터 출몰했던 유령 때문이었던 것이다. 바나도는 오늘도 반드시 유령이 나올 것 같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근무지에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식적으로는 프란시스코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지울 수 없기에 구태여 자기가 먼저 '거기 누구냐?'고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날 밤 유령은 두 번이나 출몰한다. 새벽을 맞으며 그들은 이 기이한 일을 햄릿 왕자에게 알리러 떠난다.  


불분명하기로 악명높은 <햄릿>은 이처럼 첫 대사부터 불확실성을 가지고 출발한다. 잠시 후 이 극의 주인공 햄릿이 등장하는데, 그는 안 그래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과, 어머니의 역시나 갑작스런 재혼으로 상심해 있던 터에 호레이쇼 일행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그날 밤 망루를 직접 찾아간 햄릿은 유령을 만나게 되고, 왕자는 유령이 죽은 선왕의 혼령이며, 자신의 동생이자 왕위를 계승한 클로디어스가 자기를 살해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유령은 복수를 명령한다. 하지만 햄릿은 선뜻 행동하지 못한다. 일단 이 말이 참인지 확인할 방법이 마땅찮다. 유령이 진짜 아버지의 혼령인지, 아니면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악령인지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 말이 참이라고 해도 어떻게 복수하는 것이 진정한 복수인지도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3막 3장에서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기도하고 있는 왕을 등 위에서 죽이는 일은 정당한 일인가? 악당을 처치함에 있어서도 명예를, 고귀함을 생각하는 인간이 햄릿이다.


보기에 따라 속시원히 행동하지 않는 햄릿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인물 같이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이 점에서 있어서 훨씬 더 화끈하게, 물불 가리지 않고 복수하려는 인물 레어티즈를 작품 속에 배치하여 햄릿을 더 답답하게 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햄릿이 왕을 실제로 죽이냐 마느냐에 있기 보다는 그와 같이 절대절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데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복수를 외치는 햄릿보다 질문하는 햄릿을 더 기억하는 편이다. 그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만 봐도 그렇다. 한국어로 보통 '사느냐 죽느냐 (또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가지로 충분하지 않은 번역이다. 여기서 be 동사를 살다로 옮기는 것이 마뜩찮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 문제는 따로 다루기로 하고 마지막 단어에만 일단 주목해 보자. the question을 '문제'라고 옮기는 관행이 굳어져 있지만, 실은 질문이라고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이 작품 전반에 이어지고 있는 질문들을 연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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