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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릭 Jun 09. 2020

나는 겉보기와 달라요.

I am not what I am. 

나는 겉보기와 달라요, 

혹은

나는 겉보기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이 대사를 햄릿의 저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만큼이나 인상적인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대사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은 건 아마도 악당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리라. 

셰익스피어는 <햄릿> 다음에 쓴 비극 <오셀로>의 첫 장면에서 

이 작품의 악당 이야고(Iago)로 하여금 이 말을 하게 한다.  


이야고가 얼마나 강력한 악당인지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으니 그 글을 참고하시고, 

오늘은 이 대사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려고 한다. 

어쩌면 이 대사만으로도 이야고라는 인물이 어떤 '클래스'의 악당인지 알 수 있다. 


<오셀로>는 제목 그대로 무어인 장군 오셀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오셀로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라 기대하면 오산이다. 

이 작품은 오셀로라는 장군이 그의 기수 이야고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을 주인공이라고 부른다면 <오셀로>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연 이야고다. 


<오셀로>의 첫 장면은 이야고와 로데리고의 '작은 다툼'으로 시작한다. 

(물론 로데리고가 결코 이야고의 맞수가 결코 될 수 없으니 다툼이란 말보다 푸념 정도가 맞겠다.) 

로데리고는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얻고 싶어 하는 남자로 이야고에게 모종의 도움을 받기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데리고는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와 은밀히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데리고는 오셀로의 기수인 이야고가 자기 돈만 먹고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나무란다. 

이야고는 핑계를 댄다. 

자신 또한 오셀로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그의 기수로서 따르고 있지만 결코 사랑해서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오셀로]를 따름으로써 
저는 제 자신을 따르는 겁니다. 
맹세컨대 사랑과 복종이 아니라
제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
그런 척 하는 것 뿐입니다.   
왜냐? 만약 겉으로 보이는 제 행동이 
저의 실체를 드러내게 되면
저는 제 심장을 소매 끝에 올려놓고
까마귀 새끼들이 쪼아먹게 해야 할 겁니다. 
나는 겉보기와 달라요. 


자신이 오셀로의 부하로 있다고 해서 겉모습만 보고 자신을 오셀로를 사랑하거나 그에게 충성하는 인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야고 주변의 모두가 그의 겉모습에 속아 그를 정직한 사람으로 믿는 데서 이 작품의 비극이 출발한다. 

오셀로는 이야고를 부를 때 거의 언제나 '정직한 이야고'라고 부른다.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정직이란 말이 유린당한다는 생각에 불쾌해진다. 

햄릿은 그의 친구들에게 조차 '정직하냐'고 자주 묻는 반면, 

오셀로는 의심해야 할 사람을 의심하지 않은 결과 의심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 

 

작가는 이 대사를 이야고에게 배당함으로써 두 가지 면에서 이야고를 특별하게 만든다. 


하나는 이야고의 이 말이 구약성서를 레퍼런스로 놓고 보면 

엄청나게 대범한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야고의 대사에서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알릴 때 사용한 말, 

우리 말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영어로는 'I am who I am' 으로 옮기는 그 말(אֶֽהְיֶ֖ה אֲשֶׁ֣ר אֶֽהְיֶ֑ה)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I am not what I am.이라고 일컫는 이야고는  

그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지위 등 외면적인 측면으로 자신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

I am who I am의 안티테제, 

말하자면 안티크라이스트임을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대사로 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이야고의 정체는

이후 이야고가 오셀로 앞에서 "야누스"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때(1막 2장), 

그리고 2막 3장에서 지옥의 신학(divinity of hell)을 설파할 때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 지옥의 신학은 베르디가 오페라 <오텔로(Otello)>에서 "나는 잔인한 신을 믿는다 (Credo in Dio crudel)"라는 노래로 아주 섬뜩하고 강렬하게 표현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이 대사가 발화되는 맥락인 연극이라는 형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미다. 

연극이란 배우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을 일시적으로 맡는 연기(impersonation)를 통해 성립하는 예술이다. 

미국의 연극 평론가 에릭 벤틀리(Eric Bentley)는 연극이 성립하는 최소 조건을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말한다. 

A가 B를 연기하는 동안 C가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
(A impersonates B while C looks on) 


이 말을 이야고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적용해보자면, 

아무개 배우(A)가 이야고라는 인물(B)을 연기할 때 

관객(C)은 그 모습을 보며 이야고의 사악함에 경악하고, 

또한 그런 이야고를 훌륭히 연기하는 배우에게 감탄한다.  


그런데 우리가 배우의 연기에 감탄할 수 있는 것은 그 배우가 실제로는 이야고 같은 악당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배우는 다른 인물을 연기하면서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인물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야고를 연기하는 동안 배우는 자기 안에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해하고 싶은 마음이 은밀히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배우는 내가 이야고다, 라는 고백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정말 이야고 같은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이야고를 연기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배우가 연기를 한다면 관객들은 그 연극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니 I am not what I am 이라는 말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이야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 말을 실제로 무대 위에서 하고 있는 어떤 배우의 정체성을 요약한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 인물과 배우가 동시에 존재하는 연극의 특징이자 매력이라 하겠는데, 

이 대사는 바로 그러한 매력을 우리로 하여금 음미하게 해준다. 


<오셀로>에서 우리는 전무후무한 악당 이야고를 만난다. 

오늘날의 우리는 범죄심리학이라는 학문의 도움으로 이야고를 사이코패스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 인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두려운 존재로 느꼈다. 

인간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야고는 말한다. 

나는 겉보기와 다른 사람이다.  

오셀로는 이 말을 듣지 못했고, 

그래서 그를 정직한 사람이라 믿었다.

이 말을 들은 우리는 그를 철석같이 믿는 오셀로를 보며 답답해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내가 혹시 오셀로가 아닐까?

나 역시도 겉보기와 다른 사람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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