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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릭 Apr 15. 2019

이해할 수 있다면 슈퍼 빌런이 아니다.

일인칭 셰익스피어 - 이야고

드라마나 영화를 비롯해 모든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저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개연성이란 이야기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전개되는지, 인과 관계가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허구적인 이야기에서도 논리성과 합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행동경제학이 드러내듯 인간은 많은 지점에서 의외로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않지만 이성보다 감성이 더 중요할 것만 같은 예술 작품에서도 우리는 합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토리텔링은 일종의 설득 작업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득하기 위해선 이유 또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주장이 앞에 오고 근거가 뒤 따르는 두괄식이든 반대인 미괄식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어야 우리는 어떤 주장을 타당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드라마가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식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가장 짜증 나는 순간이 언제인가요? 물론 특정한 장면이 불편하게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이야기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아닌가요? 이야기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거나, 충분한 동기나 정당성 없이 어떤 결론에 이를 때 우리는 작가 혹은 감독에게 짜증이 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줄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속아 넘어갈 수 있도록 그들이 열심을 다해 ‘구라’를 치길 기대합니다. 마치 롤러코스터가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어야 그걸 타면서 즐길 수 있는데 중간에 툭 끊어져 있거나 연결 부위가 거칠어서 지나갈 때마다 덜컹덜컹 걸리면 재미를 느끼긴커녕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허구에서 바라는 것은 현실에서는 접하거나 겪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판타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가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물의 동기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고 자기 할 일을 다하지 않은 작가와 연출가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혹 개연성의 원리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데도 여전히 말로 형언하기 힘든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오셀로>라는 작품, 그중에서도 이야고라는 인물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야고는 개연성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야고는 오셀로, 그리고 그의 부인 데스데모나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인가? 작품 안에는 뚜렷한 설명이 없습니다. 몇 군데 이야고가 하는 말들이 있긴 합니다. 오셀로가 자기를 부관이 아니라 기수로 임명했기 때문에, 혹은 그가 자기 부인을 범했기 때문에 등등 자기가 원한을 가진 이유를 밝히는데, 그게 과연 사실인지도 불확실하거니와 그렇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복수로 부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작가가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데 실패한 걸까요? 적어도 개연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셀로>를 셰익스피어의 걸작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비평가들은 오랜 세월 이야고의 동기에 대해 고민했는데 작품 속에서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답변은 사무엘 테일러 코울리지가 제시했는데, 그는 이야고의 행동이 “동기 없는 증오 motiveless malignity”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멋있는 말이지만 허망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보물 찾기를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처음부터 보물이 숨겨져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보물을 찾아야 한다고 땅바닥을 보고 있을 때 이 게임이 보물 찾기가 아님을 발견해 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 용어가 제시되고 난 이후 이야고에게서 행동의 동기를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처음부터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셀로 이야기의 출전을 비교해보면 이야고 행동의 동기 없음이 셰익스피어의 의도적인 고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거의 모든 작품을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토대로 다시 썼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저작권 개념이 명확한 오늘날 활동했더라면 불후의 작가라는 평가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오셀로>를 당시 친티오(Cinthio)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이탈리아 작가 잠바티스타 지랄디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 본래 이야기에서는 이야고의 동기가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친티오의 이야기에서 이야고는 데스데모나를 열렬히 사랑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기는 커녕 눈치조차 채지 못하자 이야고는 그 이유를 엉뚱한 곳에서 찾게 됩니다. 다른 누군가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어서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고 자기 멋대로 생각해 버린 이야고는 이내 그 인물이 오셀로의 부관으로 젊은 장교였던 캐시오라고 결론 내려 버립니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사랑은 이제 그녀에 대한 혐오로 바뀌어 버렸고, 자기가 가지지 못할 바에야 캐시오도 그리고 남편 오셀로도 그녀를 가지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이야고는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친티오의 이야고 역시 사악하긴 매한가지이지만 적어도 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분명히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오면서 바로 그 결정적인 이유를 지우고 고쳐버렸던 겁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는 데스데모나를 짝사랑하는 인물로 이야고가 아니라 로드리고가 등장합니다. 이야고는 로드리고를 겉으로는 돕는 척하면서 그의 돈을 등쳐먹고 있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이야고는 특별한 동기가 사라졌음에도 원작에서처럼 여전히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부부를 파멸시킵니다. 그야말로 “동기 없는 증오”인 것이죠. 저명한 셰익스피어 학자인 스티븐 그린블랏은 셰익스피어가 동기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방식에 주목하면서 이걸 “전략적 불투명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이 말은  정치외교 영역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유동적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한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린블랏은 셰익스피어가 그의 4대 비극에서 이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원작에선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던 동기를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지워서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확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그의 책 Will in the World 10장, 11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세계를 향한 의지>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왜 동기를 지워버렸을까요? 그린블랏의 설명을 제 나름대로 간단히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이 방식이 작품을 더욱 심오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셰익스피어가 불투명하게 한 지점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들입니다. 다시 말해 독자나 관객은 ‘그 인물은 도대체 왜 …?’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정답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 답은 이제 스스로 찾아야 할 과제가 됩니다. 독자/관객이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죠.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비슷한 상황을 찾아서 대입해보고 또한 자기 스스로에게 ‘나라면 왜 그랬을까’, 혹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동기가 뚜렷이 제시되어 있는 원작들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여전히 훨씬 더 사랑받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전략적 불투명성은 우리로 하여금 이야고가 왜 악한지가 아니라 그가 악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합니다. 이야고는 어떤 원한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해하는 인물이 됩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묻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어쩌면 이야고는 보통 인간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초인, 혹은 슈퍼 빌런으로 이해하는 게 맞을 겁니다. 실은 이야고는 중세 연극의 한 유명한 캐릭터가 발전된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세 후기에 이르면 도덕극이라는 이름의 연극이 유행하는데 기본적으로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교훈하고 계도하는 연극이었습니다. 딱 들어도 지루할 것 같지만, 오랫동안 연극이 금지되었었던 중세 사회에서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덕적인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부도덕하고 방탕한 삶을 반면교사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지점이 당시 관객들이 은밀하게 누릴 수 있는 어두운 즐거움이었을 겁니다. 아무튼 이 도덕극에서는 사탄의 하인 혹은 대리인으로서 주인공이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인물이 있었고, 그 인물의 이름이 악덕(Vice)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악당들은 기본적으로 악덕이 구체적인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 결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의 아론, <리처드 3세>의 글로스터와 더불어,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야고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가장 사악한 캐릭터입니다. 오셀로는 나라를 구하는 유능한 장군이지만 이야고 앞에서는 그저 무력하기만 합니다. 관객은 오셀로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야고의 악마적 힘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기 없는 증오. 

먼 훗날 사람들은 제가 아무런 이유도 동기도 없이  오셀로를 싫어했다고들 말한다더군요. 

정말 그랬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보죠.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여러분은 그런가요?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저도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오셀로와 저는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가장 좋았을 겁니다. 

만나더라도 제가 그자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가 내 상관으로 있더라도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하찮게 쓰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나를 자신의 부관으로는 쓰는 게 그에게 최선이었습니다. 

나더러 또 다른 멍청이를 하나 더 모시라고 해선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캐시오라니요!

오셀로는 이제 전투를 대변과 차변으로 나눠서 할 생각인가 봅니다. 

장황한 말이나 늘어놓으며 산수나 겨우 하는 캐시오를 부관으로 임명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몸은 고작 기수로 쓰겠답니다.  

나를 캐시오 같은 얼간이보다도 아래에 위치시킨다는 건 나를 모욕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모욕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입니다. 


처음부터 그자를 그렇게까지 망가뜨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맥베스처럼 저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적당한 주인 아래에서 제 잇속을 챙기자는 쪽이죠. 

겉으론 충성을 흉내 내면서 속으론 나 자신을 섬기는 데 있어 이 무어인만큼 편한 인물도 없을 겁니다. 


캐시오를 떨궈내는 걸로 충분했지요. 

그자는 자존심은 강하나 술은 약했습니다. 

그러니 술을 조금 먹이고 자존심을 조금 건드려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 일은 제가 직접 하지 않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든 가장 믿음직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하니까요.  


캐시오가 미련를 버리고 조용히 물러났더라면,

물론 제가 그러라고 부추겼지만,

그가 장군의 부인에게 통사정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물론 그것도 저의 조언이었지만,

부인이 그 말을 적당히 들어주는 척하고 한 귀로 흘려버렸더라면,

그랬더라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행복을 지킬 줄 모르는 너무나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을 그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데스데모나는 캐시오가 받은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그의 복권을 거듭거듭 탄원했습니다. 

자기가 남편을 움직일 자격도 능력도 있다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잘 믿지 못합니다. 

선의보다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 끌리기 마련이죠. 

그나마 사랑하는 사람의 선의는 믿어줄 수도 있지만, 질투심 앞에선 다 부질없습니다. 


데스데모나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오셀로의 확신은 그의 말을 몇 마디 되뇌는 순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정말요? 

이 한마디로 충분했습니다. 

외모, 나이, 풍습 그 모든 것에서 데스데모나가 자기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겁니다. 

내가 ‘생각’이란 그의 말을 되뇌자 그 모든 것에서 자기보다 캐시오가 데스데모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자기가 부족하다는 느끼면 상대가 자기를 언젠가 떠나 버릴 거라고 믿기도 쉽습니다.  

질투를 조심하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질투 앞에서 무장해제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냥 의심하지도 안심하지도 말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리고 장군님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했죠. 

하지만 오셀로는 자기에게 안 좋을 쪽으로만 생각하더군요.  

자기를 미워하는 저를 믿으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부인을 믿지 못하는 것, 그게 바로 오셀로의 비극입니다. 


데스데모나의 비극은 무엇일까요? 

그는 세상을 다 준대도 남편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얻을 수 있다면 작은 죄쯤이야 얼마든지 지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자기를 넘어뜨리려 한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죠. 


캐시오가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마음이, 데스데모나의 정의감이, 그리고 오셀로의 질투심이 그렇게 강력하지만 않았더라도 저는 실패했을 겁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탄원하는 것, 그리고 아내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 그 어떤 일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힘들이 동시에 작동할 때 그걸 누가 어떤 방향으로 돌려놓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지요. 


결국 그들은 모두 자기 힘에 자기 스스로 넘어진 겁니다. 


상상이나 해봤을까요?  

오셀로가 부러진 창도 아닌 손수건 하나에 무너질 줄을? 

데스데모나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선택한 자기 남편의 손에 죽게 될 것을? 


사실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야누스를 섬기는 저, 이야고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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