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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그리고 김규식과 여운형

김규식이 주장하고 여운형이 실천에 옮겼다.

by 온기철 James Ohn
USE%2B-%2BSuh%2BSe-ok.%2BThe%2BMarch%2B1st%2BIndependence%2BMovement%2B%28detail1%29.jpg 뉴욕한국문화원 제공

한국 사람들은 3.1 만세운동의 자초지종을 잘 모른다. 아마 분단과 냉전의 산물일 것이다. 3.1운동에 씨앗이었던 김규식과 이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여운형의 공적은 한국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두 사람은 미군정이 좌우합작 중도운동을 시도하기 위해서 중용했던 인물이다. 여운형은 미군정이 박헌영을 제거하기 위해서 앞세운 인물이었지만 김규식은 새 나라의 수반으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김규식이 김구와 같이 남한 단정을 반대하고 남북 통일 정부를 고집하여 결국 미군정은 김규식을 포기했다.


여운형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친미 반공의 나라 남한에서는 여운형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쉽사리 벗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행적은 항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18년11월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1919년1월18일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그 열흘 전 1월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은 연두 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이 무렵 여운형은 상하이에 거주하며 난징에 있는 진링대학에 유학중이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목사일을 할 정도의 크리스찬이었다.


1918년1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 칼튼 카페에서 연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운형은 협화서국이라는 서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서점의 주인이 George Ashmore Fitch 박사였다. 여운형은 피치박사에게 입장권을 부탁하여 1918년11월28일 크레인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윌슨의 특사 답게 그의 14개조 세계 평화를 위한 제안과 민족자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연설을 들은 여운형은 그날 저녁 크레인과 독대하여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크레인은 자신이 독립여부를 말할 입장은 아니라고 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 시키라고 조언해 주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여운형은 즉시 장덕수, 조동호와 함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영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초고를 피치 박사에게 보이고 수정을 부탁했다. 이때 피치 박사는 청원서는 개인자격으로 보낼 수 없고 단체명으로 보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다.


여운형은 피치 박사의 충고로 신한청년당을 급조했다. 처음 당을 시작한 당원은 장덕수, 조동호, 김철, 선우 혁, 한진교, 여운형 모두 6명이었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조선대표로 추천했다. 당시에 김규식은 몽고 접경지대에 있는 장가구의 앤더슨 마이어 라는 미국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언더우드는 그를 미국에서 교육시켰다. 그는 버지니아 주에 있는 르노크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영어에 능통했고 서양 풍습에 익숙해서 파리평화회의 대표로 적격이었다.


어렵사리 여권과 배표가 마련되어 신한청년당 당원, 여운형과 김규식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때 김규식이 의미 심장한 제안을 했다.


“내가 떠나기는 하되 세계각국 대표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 리가 없다. 지도상에서 보더라도 조선반도는 쌀알만큼 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코리아라는 나라는 거의 알려 지지를 않았다. 내가 만일 정식 대표라면 회의 석상에 좌석이 있고 발언권이 있겠지만 나는 방청객에 불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 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 독립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이 김규식의 제안은 만세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신한 청년당 당원들은 지체 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김규식은 민족의 궐기를 주문하고 1919년2월1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파리로 향했다.


여운형은 1919년1월20일 경 만주와 연해주 지방으로 향했다. 이곳은 아직 일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지역이어서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만이 넘는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목적은 시위 계획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이었다.


여운형은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유학생들의 궐기를 종용했다. 한편 미국유학 중이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형의 연락을 받고 1919년 1월14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1일에 동경에 도착했다. 그는 최팔용 등 일본 유학생들을 만나서 형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유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2월14일 장덕수는 우에노 공원에서 여운홍과 접촉하여 형 여운형이 준 편지를 전달했다. 여운홍은 형의 편지에 담긴 지시대로 국내에 잠입하여 이상재, 최남선, 함태영, 이갑성 등을 만나 궐기를 촉구했다.


여운형은 선우 혁,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한송계 등을 국내에 파견했다. 이중 선우 혁은 국내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하여 이들이 대거 3.1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당시에 전국 각처의 교회는 가장 잘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이 운동에 기독교인들의 참여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다. 김철은 천도교와 접촉했다. 천도교 조직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규식의 두 번째 부인 김순애는 결혼한지 15일 만에 남편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야 했다. 김순애는 국내에 잠입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했고 이에 따른 국민봉기의 필요성을 국내 인사들에게 자청해서 알리려 했다. 그는 부산에서 백신영을 만나고 대구에서 그의 종고모인 김마리아를 만났다. 서울에서는 함태영을 만났다. 그는 국내에 남아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려 헸으나 함태영과 김성수의 만류로 만주로 망명하였다.


선우 혁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은 기독교 계통의 세력 만으로 궐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천도교 측에서 연락이 와서 2월11일 평양에 있던 그는 서울로 갔다. 2월21일 최남선이 이승훈을 찾아와서 천도교 측 최린의 집을 방문하여 거사를 논의했다. 천도교 측은 이승훈에게 기독교측 거사 자금으로 5천엔을 주었다.

장덕수는 2월17일 동경을 떠나 2월20일 경성에 돌아온 뒤 이상재를 비롯한 사회 지도자들과 청년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상하이와 도쿄의 시위준비 현황을 전해주었다. 일경의 추격을 피하려고 인천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를 비롯한 15명이 2월25일부터 3일간에 걸쳐서 서명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2월16일 이승훈, 양전박, 박희도 등이 한강 인도교에서 만나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여 16명이 서명했다. 여기에 불교 측에서 한용운, 백용성 스님이 참여하여 33인이 완성되었다.


독립선언문은 최남선이 2월11일에 탈고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2월20일부터 인쇄하기 시작했다. 2월 27일 밤까지 35,000매가 인쇄되어 28일부터 전국에 배포되었다. 당시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곳은 교회, 학교, 병원이었다. 교회는 독립선언문 전달에 가장 큰 역할을 해냈다.

일제의 교사가 의심되는 갑작스러운 고종의 사망은 민중의 반일 감정을 고조시켜 민심이 술렁이고 있었다. 고종의 장례식 날인 3월3일에 시위를 계획했으나 이날 소란을 피우는 것은 황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여론이 분분하여 거사 날을 3월1일로 정했다.


처음 만세 운동이 시작된 곳은 서울과 이북의 평양, 선천, 안주, 의주, 원산이었다. 3월2일에도 함흥, 수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 해주, 개성 등 이북에서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 날 충남 예산에서 남한 처음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3월4일에는 전라북도 옥구에서, 3월8일에는 대구, 3월10일에는 전라도 광주 등으로 확산되었다.


3월1일에 시작된 만세 운동은 이후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집회 횟수는 1,540회였고, 참가 인원 수는 202만 3,089명이었다.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는 1만 5,961명, 검거자는 4만6,048명이었다.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가 불에 탔다.


만세 사건은 일제가 조선 통치에 강압적인 무단정치를 유화적인 문화정책으로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 신한 청년당이 모체가 되어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서 무장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만세운동은 김규식이 제안하여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국내의 지사들을 자극하여 이루어 낸 거사라고 생각한다.


3.1운동 후 조선에서 현순, 손정도, 신익희, 최창식이 일본에서 이광수와 최근우가, 시베리아에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신채호, 김동삼 등 30여명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여운홍도 상해로 와서 형 여운형과 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상하이로 몰려든 독립운동가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임시정부 조직에 반대했다. 정부는 주권, 국토, 인민이 있어야 하는데 조선은 세가지가 모두 없고 정부를 세우면 체면 유지비가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 명의가 태중하여 운영도 곤란하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해방 직 후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만들어 조선 총독부로부터 위임 받은 수권 작업을 진행하려 했다. 반면에 김구는 중경(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미군정을 인정하지 않고 중경임시정부가 새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서 김구와 여운형은 정면 충돌했다. 그래서인지 김구는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크게 의심받고 있다.


여운형은180 cm이 넘는 헌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운동으로 단련된 체격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웅변가였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그 누구 보다도 일제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군정기에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내가 자랄 때 학교에서 그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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