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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그리고 중립론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중간에 서야한다.

by 온기철 James Ohn


lnESSZ86PKAHHBojVbMMf-5wvZ1BtK-D7iIpxTQDy0BtRwjSHUtksV7dz3JmLef24FKSbtzbS6-oVjEz95OMAQ.webp 나무위키(한반도)

과연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임정)의 연장일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씨모노세끼 조약에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국 역할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조선은 명목상 독립국가가 되었다. 10년 동안의 청나라 직접지배에서 벗어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조공국의 나라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은 종주국이었던 청나라 황제와 동등한 자격을 얻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일본이 청나라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인지 임정은 대한민국이 실속 없는 대한제국을 승계했다고 하지 않았다.


일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세계는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가고 식민지의 약소 민족이 나라를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민중에게 주권이 주어지는 정치 형태를 민주주의라고 한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인정하는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라고 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을 공산주의라고 한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모두 민주주의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는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지만 공산주의 국가는 독재국가로 변신했다. 그래서 인지 냉전시대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로 정의한다.


공산주의 혁명의 승자 레닌은 1917년 11월15일 러시아에 살고 있는 100여 개의 소수민족의 민족자결 원칙을 선포했다. 소수민족에게 자기들의 나라를 만들 권리를 부여한다는 선언이었다. 이 후 핀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유크래인, 트랜스코카시아, 폴랜드 등이 독립했다. 물론 레닌의 저의는 공산주의의 파급이었다.

이듬해 1월 8일, 윌슨 미국 대통령은 연두 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이는 전세계 식민지 소수민족에게 전 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상하이에 망명해 있던 독립운동가들도 이에 크게 고무되어 바쁘게 움직였다. 파리 평화 회의에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보니 그가 대표할 어떤 형태의 기관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한청년당이 창설되었다. 김규식이 전세계가 조선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3.1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3.1 운동 직 후 상해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

그런데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본질과는 정 반대였다. 승전국의 식민지 약소민족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패전국의 식민지에게만 혜택이 돌아갔다. 회담의 주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 편이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던 미국은 상해임시정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러시아의 레닌은 상해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임정 초기의 대부분의 자금줄은 러시아였다. 자연히 많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임정에 참여했다. 사상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러시아와 레닌에게 친화적이었던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단결된 하나의 조직으로 이루어 지지 못했다. 수많은 파벌로 갈라졌다. 레닌은 어떤 단체에 원조를 해야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레닌은 상해임시 정부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극심한 자금난으로 임정은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중요인사들이 모두 떠난 임정을 김구 혼자서 떠 맡았다. 김구는 궁여지책으로 애국청년단을 만들어 의열 활동으로 한국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려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 이봉창과 윤봉길이 김구를 찾아왔다. 이봉창은 일본 천황 행차에 폭탄을 투척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중국인들은 열광했다. 이봉창 사건은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된 조선사람들과 중국인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 앙금을 완전히 씻어주고 임정이 철저하게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지하게 된 사건이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이었다.


1932년 4월29일은 일본 천황의 생일 천정절이었다. 마침 일본이 상하이 전쟁에서 중국의 19로군을 제압하고 실질적인 상하이의 지배자가 된 날이기도 했다. 천정절 잔치와 상하이 전승을 축하하는 행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19로군은 장제스의 정예군이었다. 일본 상하이군 사령관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었다. 장카이샠의 19로군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에게 패퇴한 것이었다. 이날 단상에 있던 그는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복부에 상처를 입고 수술을 받았으나 합병증으로 얼마 후 사망했다. 장제스의 19로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대한의 청년 윤봉길이 거뜬히 해낸 것이었다. 장제스는 이 소식을 듣고 “중국의 백만대군도 해낼 수 없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고 극찬했다.


이후 김구와 임정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운명을 같이 했다. 장제스는 김구가 이끄는 임정을 철저히 보살폈다. 김구와 임정은 거의 완벽하게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 의존했다.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한반도에 김구와 임정이 통치하는 정부를 수립하게 하여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에 두려고 했다. 김구 또한 이를 기대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에 관한 구절을 넣게 한 장본인이 장제스였다. 그러나 1945년 9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장제스는 곧장 마오쩌둥과의 전쟁에 휘 말린다. 그리고 1949년 장제스는 내전에서 패배하여 중국을 머우에게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났다. 장제스를 원조했던 미국은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되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에 장제스의 국민당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중국대륙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가 되었다면 해방 후 임정의 영향력은 막강했을 것이다.

중국은 태평양전쟁 이후 4개 연합국중의 하나였다. 영국, 미국, 소련 그리고 중국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받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중국을 연합국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통치의 장악력이 취약했다. 군벌의 영향력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분열되어 있었다. 더구나 장제스 정권은 극심한 부패와 독재로 국민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만약에 국민당 정부가 건실했고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만주의 일본 관동군도 소련이 아닌 중국이 처리했을 것이고 소련이 북한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애초에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만주는 당연히 국민당 정부 몫이었다.

그렇다면 김구의 임정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에 들어와서 조선총독부를 인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새나라 국호를 자연스럽게 임정이 정한 대한민국으로 했을 것이다.


해방 후 장제스는 충칭을 떠나는 김구에게 20만불을 주고 통신병을 딸려 보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와 임정 요원들은 남한의 미군정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입국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라는 하달을 받고 기다렸다. 갑론을박 토론 끝에 그 서류에 서명하고 미군이 제공한 수송기를 타고 귀국했다. 김구를 맞이한 고국은 해방된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이 나간 자리에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미군정이 임정을 인정하지 않은 만큼 김구 또한 미군정을 불청객으로 취급했다. 미국은 김구를 남한에 친미 반공국가를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는 국수주의자로 생각했다.


미군정은 철수 후에 남한을 미국의 국익에 맞는 통치를 할 인물을 물색했다. 김규식, 장덕수, 서재필을 거쳐서 이승만으로 귀착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이승만이 해야 할 일은 친미와 반공이었다.

과연 상하이 임시정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도 친미와 반공을 위한 나라였을까?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은 신분과 직업에 따른 차별 없이 자유와 평등을 구가할 수 있는 새나라를 원했을 것이다. 물론 분단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미와 반공은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긴 역사 속의 단편적인 착오일 뿐이다.


친미와 반공은 한국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이 맞아 떨어졌을 때 가능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요 지음 세상은 냉전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공산주의는 지구상에서 거의 다 사라지고 미국은 옛날 잘 나가던 미국이 아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문단속하기에 바쁘다. 한국이 미국을 믿고 미국 일변도의 외교를 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중국과 미국이 자웅을 겨누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에 맹장 처 럼 달려있는 한반도는 태평양이 웨어 싸고 있다. 태평양의 미국과 유라시아 대륙의 중국사이에 있다. 지리적인 위치와 같이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중립을 선언할 때가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온 민족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잘 사는 대한민국이었다. 조선에 살 던 우리 조상들은 양반, 상놈, 노비, 천민으로 신분을 정해놓고 차별했고 사농공상이라 하여 공업과 상업을 천시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은 양반 밖에 없었다. 일제시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꿈꾸던 나라는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물건을 만들어 팔고 농사지어 내다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대상이 없는 반공을 하고 주는 것 보다 얻어가는 것이 많은 미국에 매달여서는 한국민족이 잘 살 수 없다. 대륙이 공산국가로 가득 차 있을 때는 태평양의 미국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륙이 태평양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은 이 중간에 서야 한다. 그러면 양쪽이 땡 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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