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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복 May 04. 2023

빨간 맛

라볶이의 위로

언제부터였던 걸까? 고된 하루의 끝엔 매운맛이 끌렸다. 위장병을 달고 산다. 덕분에 끌리는 대로 매운맛을 항시 달고 살 순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매운맛의 단계는 그래서 늘 소박했다. 맛이 소박하다고 하면 다들 갸우뚱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소박하다’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수수하다’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수하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좋아하는 맛의 정도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작가처럼 나는 어떤 순간에도 ‘라볶이’는 포기하기가 어렵다. 떡볶이와 라면과 오뎅의 조합은 언제나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라볶이는 야박하다. 떡볶이를 파는 곳이라면 의당 라볶이도 있기 마련이지만, 어딘지 떡볶이보다 양이 적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거의 라면 사리가 아쉽거나 혹은 전반적으로 먹고 나면 허탈한 느낌이 든다. 


어느 날 집 근처 단골 커피집 사장님이 추천해 준 1~2인만 이용할 수 있다는 맥주 펍을 가게 되었다. 맥주를 파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놀랍게도 모든 음식이 푸짐하고 맛있었다. 그중 단연코 나의 미각을 자극했던 메뉴가 있었으니, 그것은 떡볶이다. 처음엔 로제 떡볶이만 주로 시켜 먹었다. 분식 전문점이 아니니까 떡볶이는 맛있기 어렵다고 단정했다. 다행히 로제 떡볶이 맛이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고착된 주문 습관은 굳이 방향을 선회할 이유가 없었다. 


어느 날 무심코 주문을 하고 1인석에서 코를 박고 책을 보고 있는데, 떡 하니 나온 음식이 빨간 떡볶이였다. 응? 음식을 내오신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의 눈빛은 흔들렸다. ‘그러게. 너 떡볶이 시키길래 이상하다 했어.’ 짧은 수 초간의 눈빛 교환에서 그 많은 어휘를 간파한 나는 잠자코 나의 실수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포크를 들었다. 내가 왜 그랬지,라고 자책하면서 떡볶이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떡과 떡 사이로 좁아터진 빈틈을 견디지 못하고 비죽하고 나와버린 라면 사리를 보고 말았다. 네가 왜 거기서 나오니? 메뉴판을 다시 뒤적여 보아도 메뉴에 라볶이는 없었다. 세상에. 떡볶이에 라면사리가 뭉텅이로 들어 있을 수가 있다니. 게다가 수수한 빨간 맛까지! 


예상하지 못한 행운을 얻은 느낌을 아는가? 그날 나의 주문 실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당연히 그날부터 충직한 단골이 되었음은 말해 무엇 하리. 빨간 맛은 마음이 노곤해질 때 더 당긴다. 빨간 맛을 한 입 베어 물면 전두엽까지 짜릿함이 전달되는 기분이다. 그 짜릿함은 무디어진 감각을 적당히 긴장시키고 다시 발딱 일어서게 한다. 우중충한 날에 먹는 빨간 맛은 우울과 긴장을 솜씨 있게 버무린다. 어쩌면 기운이 없는 날마다 빨간 맛을 습관처럼 찾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으로만 편중하여 빠져들게 하지 않으니까. 결코 골을 파고 깊숙이 고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가끔 내가 쌓인 피로를 자각하지 못하다가 퇴근길에 나도 모르게 편의점에 들러 ‘라볶이 컵면’을 살 때가 있다. 품에 안아 든 라볶이 컵면을 보고 집 앞에서 황망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무디거나 혹은 무뎌야 견딜 수 있었던 시간들을 오래 살다 보니 붙게 된 습 일거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아쉽지만 라볶이 소스에 버무려진 라면으로 마음을 달랜다. 


뭐든지 희소해야 더 가치가 발하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빨간 맛을 남발하여 찾진 않는다. 에너지가 거의 바닥을 드러낼 만큼 소진되었을 때, 아끼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찾아간다. 아끼고 아낀 빨간 맛은 그래서 일상이 주는 소담한 상장 같다. 등 두들겨 주던 엄마의 손길 같다.


가끔 나의 빨간 맛 사장님은 내가 먹는 떡볶이에 오뎅과 라면사리를 떡만큼이나 넣어 주신다. 아는 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그 위로 때문에 빨간 맛을 품고 살아가는 거겠지? 오늘도 빨간 맛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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