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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zich May 16. 2017

고통을 마주하는 고통, 진정한 치유의 사랑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Love)>

작품 :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Love, 1995)

출연 : 그라지나 자폴로스카, 올라프 루바젠코, 스테파니아 이윈스카

감독 :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는 미디움샷에서 대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진행된다. 그리고는 롱 샷으로 이따금 반복되는 관찰행위. 사람들은 이를 관음이라고 부르지만 그 행위를 표현하는 카메라와 배우의 연기는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것’에 대한 관찰과 관심을 농밀하게 그려낸다. 또한, 화면과 결합되는 사운드(매우 정적이고 낭만적/슬프게 들리기도 함)는 거의 변용되지 않고 반복해서 쓰인다.

 

 반복적으로 클로즈업되는 조리개. 창문은 곧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의미할 것이다. 프레임을 통해 프레임 안의 그녀를 보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보여주는 프레임은 하나의 ‘액자’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또한 어둠 속의 빛이며 그녀는 소년에게 곧 빛이다. 소년은 어둠 속에 있을 지언정. 그래야 빛을 더 선명히 자세하게 볼 수 있음은 상식이기도 하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 그는 먹으면서도 그녀를 본다. 이 때 역시 음악은 일관되게 쓰인다. 이쯤 되면 이것은 ‘음악’이나 ‘비지엠’이 아닌 ‘사운드’로 작용한다고 봐야한다. 이 자체로도 에로티즘은 구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그녀에 대한 욕망이며, 앞서 말한 사운드의 일관성이나 철저히 절제된 카메라워킹까지- 화면상에서 그 어느것도 방해하고 있지 않다. 내용상으로든, 기법상으로든 방해 없는 순수한 욕망은 화면 안에 담백하게 드러난다.

 

 지속적으로 미디움-클로즈업 샷이 반복된다. 하지만 반대편의 그녀를 보여주는 것은 롱 샷이다. 이게 무엇이 특별하냐고 할 지 모르지만 이 작은 것에서부터 감독의 관점은 발견된다. 바로 소년이 그녀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소년의 시각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 그리고 카메라는 그의 관점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압권은 그녀에게 찾아온 남자와 둘의 접촉을 보게 된 소년의 눈(망원경-카메라렌즈)가 딸깍 하고 블랙아웃되는 것이다. 그의 눈이 곧 망원경이며 카메라임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방법은 ‘우유배달’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난다고 해도 그녀를 그렇게 볼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기쁘다. 빈 우유병을 내놓지 않았다는 구실로 벨을 눌러 그녀의 현관문을 열게 하는 것에 대해 그 누가 거짓을 행했다고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아무 이물질도 섞이지 않은, 그녀를 위한 순수하고 깨끗한 맹목이다. 사랑은 희생이고, 눈이 머는 것이니까.

 

 상처받는 그녀. 모든 씬을 통틀어 그녀의 커다란 심경에 가장 결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시퀀스. 이 시퀀스조차 화려하지 않다. ‘보여주기’ 이외에 이 인물들의 감정과 삶에 카메라는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우유를 엎어버리고 흐느끼는 시퀀스는 이 영화 내에서 가장 상징적이어보인다. 우유는 소년이 그녀를 만나기 위한 매개이다. 우유가 불현듯 쏟아져버리는 건, 그 맑고 하얀 우유와 같은 소년의 사랑을 그녀도 모르게 쏟아버린 것을 의미할지 모른다. 이제 소년의 시선에서 카메라는 전환된다. 쏟아진 우유는 보이지 않고 흐느끼는 그녀만이 점점 비중있게 프레임 안에 차오른다. 소년에게 중요한 건 아직도 쏟아진 그의 마음도 아니다. 그녀의 슬픔과 그녀의 감정 그녀를 걱정하는 딱 한 가지 마음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소년과 어머니가 일전에 나눈 몇 마디 대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압축적으로 알려준다.

 

“왜 사람들은 울까요?”

“사람들은 운단다.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혼자 남겨졌을 때,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말이지.”

“그럼, 도와줄수도 있잖아요?(그 사람들을)”

“언젠가 마르친이 이가 아프다고 했을 때, 다리미가 뜨거워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여기(어깨)에 대고 있었지. 그리고는 곧 이가 아픈 것을 잊게 되었단다.”

 

 이 대화는, 고통이라는 것은 곧 마주해야 나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소년이 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 우리가 어린 시절 많이 하고 놀았던 가위 찍기 놀이를 ‘눈을 감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고통을 고통으로서 잊으려 하는 행위일 것이며, 이는 곧 그가 그녀로 인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 짧은 쇼트에서조차 ‘다른 고통’으로 그의 ‘진짜 고통’을 더 깊이있게 느끼도록 감독은 유도하고 있다. 이내 찍힌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그는 조용히 입으로 가져간다. 진정한 소화. 고통의 소화. 어둠의 소화!

 

 소년이 우편함에 쪽지를 넣는 장면은 시네마토그래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영화 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우편함에 수평으로 뚫린 수개의 구멍은 곧 필름이며, 그 수많은 구멍 중하나의 구멍에 넣는 하나의 종이는 곧 그녀의 삶에 투입되는 그의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이쯤 되면 과한 해석이라 할지 모르나, 어쨌거나 이와 같은 해석을 이 작품은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영화예술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소년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된 이유는 고결한 그의 진심이 오해되고 퇴색되어서이다. 그는 그녀만을 바라보는 그 마음 하나가 소중했으나, 그녀는 소년과 그녀 사이에 타인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소년은 그 두려움과 맞선다. ‘네 놈이냐?’라고 말을 건 남자는 분명 ‘훔쳐본 게 너냐’는 의미에서 물어보았겠지만, 소년의 ‘yes’는 나에게 ‘난 그녀를 사랑해요’라는 대사로 바뀌어 들렸다. 소년이 흠씬 두들겨맞는것조차 영화 속에서는 그녀를 향한 사랑의 진심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그녀와 마주하게 된 소년. 그녀는 또 다시 소년의 진심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다음 대사에서는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의 의미와 소년이 느끼는 사랑의 괴리가 드러난다.

 

“나랑 키스하고싶니?” “아니오”

“나랑 자고싶니?” “아니오”

“그럼 함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니?” “아니오”

“그럼 대체 뭘 원해?” “아니오”

 

 내 안의 에로티즘이 의도치 않게 포르노그라피로 바뀔 때, 그것은 원치 않는 고통이며 부자연스러움일 것이다. 포르노그라피는 결코 희생을 담아낼 수 없으며, 반면 진정한 에로티즘은 희생과 죽음을 통한 창조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의 경험적인 역사들만을 따라 생각하며 사랑에 대한 자만, 사랑을 ‘아는 것’에 대한 우월감으로 소년을 가르치려 했다. 사랑은 경험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나이의 많고 적음이 성숙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어떤 경험을 했든, 몇 살을 먹었든, 사랑은 각자의 방식과 관점에서 진심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후반부 시퀀스에서, 그리고 마지막 씬에서 그녀가 거꾸로 그의 창문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 소년이 했던 행위의 반대편에서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픔의 발견, 사랑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 마주함. 이는 곧 자신의 상처,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마 그녀를 어루만지는 소년의 손길을 그녀가 보게된 건, 비록 실제가 아닐지라도 ‘소년의 사랑이 대체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진실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반성인 동시에 치유였을 것이다.

 

 나는 이런 영화가 좋다. 반대로 관객을 슬픔이나 기쁨의 틀에 가둬놓고 몰아붙이거나, 캐릭터의 발산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작품들. '쉬운 작품'이라고 해서 다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나, 영화가 삶을 담아내는 예술의 표현이라면 삶이 어디 그렇게 쉽고 명료한지부터 증명해봐야 한다. 영화를 그저 영화로서 보게 하는 작품들은 언제나 옳다. '이유가 있는 카메라', '이유가 있는 사운드', '이유가 있는 연기'. 진짜 영화들에는 전부 그렇게 만들고 보여주기 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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