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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zich May 16. 2017

"우린, 이상할 때 만났어."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

작품 :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 :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고등학교 3학년 때,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한창 활성화되던 시절 나는 평소 좋아하던 배우인 최강희 씨의 미니홈피 게시판에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고 항상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고맙게도 ‘내 안에 여러가지 내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것 조차도 님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댓글이 달렸다. 보통, 의지대로 행동이 되지 않거나, 당초에 생각했던 계획과 다른 마음을 먹고 있을 때- 혹은 굉장히 악마적이고 일탈적인 생각을 한다거나- 뭐 그럴 때에 위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이 대한 꽤 사려깊은 대답이었다.

 

 1999년 작인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1,2 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땐 그저 타일러(브래드 피트 분)의 남성성과 외모, 말투가 굉장히 멋있었고 극 중 내레이션 및 주인공을 맡은 에드워드 노튼은 ‘찌질한 놈’ 정도로 상정하고 어린 시절 보통 누구나 간단하게 나누게 되는 선악 구도에 치중해서 감상했다. 사실 그 이후로도 몇번 더 이 작품을 다운로드 받아 보았는데, 주로 자극적인 구타 씬과 타일러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등장하는 씬 위주로 스킵하면서 보곤 했다. 아마 일상적이지 않은 연출과 연기가 마음을 이끌었을 것이다.

 

 꽤 오랜만에 다시 본 ‘파이트 클럽’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이미 결말을 빤히 아는 상황에서, 그리고 뭇 사람들이 나름대로 타일러를 에드워드 노튼(극중 ‘나’ _ 이하 ‘나’로 언급하겠다)의 또 다른 자아 혹은 만들어진 구상물이라고 해석한 것을 알고 나서 보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구상물은 타일러 뿐만이 아니다. 말라(헬레나 본햄 카터 분)를 비롯해서 극중 ‘파이트 클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내가 보기에 ‘나’의 현현이다.

 

 중간자적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시나리오를 끌어 가는 ‘나’를 중심으로 봤을 때 타일러는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정 반대로 갖추고 있다. 자유, 섹스심볼, 영민함, 힘, 반항적 기질까지 타일러가 가진 캐릭터는 극중 ‘나’에게 있어 모종의 선망이자 쉽게 이뤄낼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말라는 어떨까. 그녀는 한 눈에 봐도 약에 취해 있고, 퇴폐적인 몰골을 하며 각종 치료모임에 병자인 척 하고 끼어들어 정신적인 ‘대리 치유’를 꾀하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타일러를 만나기 전, 그녀와 마찬가지 행동을 하며 살아가던 사무직 신분의 ‘나’는 그녀를 맞닥뜨리며 자괴감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자괴감을 맛보면서도 ‘나’는 그 위선된 행동을 멈추는 쪽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와 맞닥뜨리지 않는 선에서 치료 모임을 나누어 나가자고 제안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시스템과 사회구조에 천착된 내가 최대한의 선에서 부릴 수 있는 일탈이자 해방구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우리들의 보편적 질환이나 합리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말라는 또다른 ‘나’이지만 내 안에 존재하는 비뚤어진 여성성과 혼재하는 존재라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이제, ‘나’는 그런 말라와 타일러가 격렬한 섹스를 반복하는 것을 목격한다. 곧, 내 안의 폭력성과 무기력함이 반복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보기에, 타일러는 말라를 격하게 취하고는 ‘나’에게 말한다. “들어가서 네가 끝낼래?” 라고. 이 때 ‘나’의 표정은 그 충돌과 결합 사이를 줄타기하는 섹스가 굉장히 불편하고 꺼림칙하며 자존심을 침범당한 불쾌함으로 찡그려진다.

 

 어쨌거나 일련의 사건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함은 차치하고서라도, 타일러를 만난 후 ‘나’는 모종의 성취감을 맛보기 시작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출근

하던 직장생활에서조차 얻어터진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며 일탈과 반사회성을 일상으로 바꾸어낸다. 타일러가 반복하는 ‘직업이 다가 아니고, 돈도 다가 아니고, 권력이 다가 아닌’ 일종의 모토는 ‘나’의 일상에 묻어나기 시작한다.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고, ‘파이트 클럽’이 열리는 지하공간은 삽시간에 굉장히 많은 멤버들을 보여준다. 이들이 하나 둘씩 가입하는 절차라든지, 오디션이라든지- 따위를 보여주는 장면은 전혀 없다. 이쯤에서 슬슬 이 멤버 모두가 ‘나’의 모습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곳엔 극 초반에 치료 모임에서 만난 밥(미트 로프 분, 보디빌더였으나 약물과다복용으로 유선 팽창증을 앓고 있는 인물)또한 멤버로 끼어 있다. 피가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맞으면서 멤버들은 모두 ‘타일러’ 그 자체가 되어 간다.

 

 규모가 커진 파이트클럽은 초반의 모습과 다르게 자신들의 비행과 일탈을 사회에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공권력을 피해 다니며 여기 저기에서 꽤나 심각한 사고를 내면서. 그리고 나서는 타일러의 집에 모두 돌아와 뉴스화된 사고들을 방관하듯 바라본다. 자, 정확히 이 장면부터 ‘나’는 파이트클럽에 대한 직접적인 불쾌함을 드러낸다. 만족감을 보여 왔던 내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리는 장면이다. 머리에 총을 맞고 주검이 되어 돌아온 ‘밥’을 보고 그 불쾌함은 더욱 격렬하게 요동친다. 죽은 밥의 시신을 마치 물건처럼 대하는 멤버들의 태도에 ‘나’는 ‘그의 이름은 밥 폴슨’이라고 외치고, 이후 모든 멤버들은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양 ‘His name is Robert Paulsen’을 기계처럼 반복한다. 자기모순과 충돌 끝에 극단적으로 마주친 상황에서 수십 개의 자아는 편집증적으로 충격적 결과를 뇌까리는 것이다.

 

 결국 타일러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모든 퍼즐이 맞춰질 무렵, 다시 한 번 타일러와 대면한 나는 그에게서 ‘말라를 처리해야 한다. 그녀는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라는 말을 듣게 되고, ‘나’는 차마 그러지 못하면서 말라를 보호하려 한다. 여기서 더욱 확실해졌다. 말라 또한 ‘나’의 모습이다. 상황의 극단 속에서 결국 지킬 수 밖에 없는 ‘나와 가장 닮아있는 모습의 나’인 것이다. 끝내 버스를 타고 ‘나’를 떠나는 후반부 장면에서의 말라는 처음과 다르게 맑고 이성적이어 보인다.

 

 마침내 ‘나’는 스스로의 입 속에 총을 쏘면서 타일러를 삭제하고, 다시 말라의 손을 잡게 된다. 굉장히 아이러니컬하게도, 분명 타일러를 없앴는데 창 밖으로 도시 건물들이 마치 불꽃축제를 하듯 폭파되는 장면이 펼쳐진다. 진정한 해방이다. 파이트클럽에서 행했던 그 많은 일탈과 도시 폭파와는 다른, 아련함과 슬픔ㆍ기쁨이 혼재된 연출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너무 쉽게 타자화하도록 종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학교 생활, 직장 생활에서의 나, 집 안에서의 나, 지하철 안에서의 나, 버스 안에서의 나, 변기통 위에서의 나, 여가를 즐기는 나.... 너무나도 많은 역할과 모습들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강제된다. 그래서 때로는 헷갈리고 복잡해진다. ‘무엇이 진짜 나의 모습인가’ 혹은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너무도 많은 것이 아닌가’. 방법은 그 모든 나의 모습들이 결국 ‘하나의 나’임을 온전히 씹어삼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나에게 강제되는 역할을 과감하게 거세해버리든지-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모든 해결책과 방법을 생각해보는 것을 보류하고, 마지막에 말라의 손을 잡은 '나'는 나지막이 말한다.

 

“You met me at a very strange time in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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