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Pickpocket, 1959)
작품 : 소매치기(Pickpocket, 1959)
감독 : 로베르 브레송
출연 : 마틴 라살레, 마리카 그린, 장 펠레그리, 피에르 에텍스
영화 ‘소매치기’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눈에 띈 것은 바로 그간 보아오던 영화들과 다른 배우들의 연기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표정’이나 ‘대사’를 통해 연기하지 않는다. 물론 표정과 대사가 아예 탈락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모델’로서 연기하며 ‘상황’을 통해 대화한다. 예를 들어, 미셸이 소매치기를 감행하든, 소매치기범인 것이 드러나 체포되든 그는 일관된 표정을 보여준다.
다만, 각 쇼트의 연결이 만들어낸 상황은 어찌보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행동과 표정들의 분위기를 생성한다. 일관된 표정과 행동은 모든 컷이 연결되는 방식과 환경에 따라 붙는다. 어쩌면, 수많은 컷으로 분절된 짧은 영상들을 이어붙인 느낌이 농후하다. 그리고 동시에, 컷 전환 사이에 나타나는 배우들의 행동은 마치 ‘전환’을 상징하듯 유독 빠르게 진행된다.
또한, 꽤 많은 컷의 전환이 사물을 매개로 전환되는데(장소의 전환 with 신문 to 신문) 이는 주로 미셸의 소매치기 기술 연습에서 실전(?)으로 전환되는 장면과 혹은 그 역의 장면에서 주로 사용된다. 이를 통해 행동의 원인과 결과, 장소의 이동, 시간의 진행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시네마토그라프의 측면에서 개인적인 추측이 남는 장면이 발견되었다. 미셸은 항상 전차에서 내릴 때, 뒤를 돌아서는 전차가 진행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뒤로 내린다. 레일 위를 한 방향으로 달리는 전차가 곧 필름을 의미한다면, 필름의 진행방향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툭, 하고 내리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컷 혹은 그림’을 의미할지 모른다. 이 해석이 맞다면 이 장면은 ‘영화 속의 영화’를 나타내는 장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단연 압권이다.
기술적인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지금의 관점에서는 몇몇 재미있는 장면들이 포착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은행에서 택시로 이동하며 소매치기를 감행하는 장면이 가장 눈에 띄는데, 아마도 지금이라면 슬로우를 걸어 굉장히 유려하게 보여주었을 장면이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느리고 기계적인 행동을 통해 사실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워보일 촌티 아닌 촌티를 날린다. 하지만 이는 기술적인 차이에서 느껴지는 한계일 뿐이지, 작품 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아무리 영상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필요하다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해야 할 것이다.
‘소매치기’ 속의 미셸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아마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로 가득찼을 것이다.
사리사욕을 위한 도둑질도 아니고, 단순 재미를 위한 편집증적 행위도 분명히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미셸의 방황이며, 세상이라는 어둠과 모순 속의 또다른 혼란이다. 다만 그가 믿는 것은 ‘진리’이기에, 유일한 그의 표정 변화는 교회에서 눈물을 통해 드러난다. 아마 이 눈물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구하려는 구원 혹은 구도자의 아픔일지도 모르고, 비자발적으로 이 세계에 놓여진 모든 삶들에 대한 연민과 에로티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셸은 쟌느에게 말한다.
“무슨 근거로 (세상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을까요. 말이 안 돼요." "난 신을 믿어요 쟌느.”
이후, 미셸은 더욱 당당해질 수 있었다. 바로 그 이유는 점차 그가 그 자신의 에로티즘에 마주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황과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점차 명확해지고, 그럴수록 또렷해지는 쟌느에 대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층위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든간에,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자신을 마주할수록 그녀에 대한 마음도 명확해져간다. 이는 동시에 쟌느도 마찬가지이다.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자꾸만 그녀의 외부에서 손짓하던 그녀 역시 스스로를 마주한다. 스스로를 마주하는 바로 이 순간에, 비로소 관계는 불꽃이 튀듯 엮이고 맺힌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쟌느의 이마에 입술을 부비는 미셸의 모습. 그 투샷은 웬만한 그 어떤 정사신보다도 농밀하다. 그제서야 고백하는 미셸의 대사는 물음표를 품고 감상하던 관객의 궁금함을 해소하다못해 깨달음의 경지로 이끈다.
“오 쟌느, 당신에게 이르기 위해서 나는 그 얼마나 기이한 길을 걸어 왔단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