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행복한 노후를 준비하는 바람직한 자세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엄살이 아니라, 아무리 제 글을 읽고 맘이 동했더라도 직장에서 시달리고 집에 돌아오면 우선 ‘쉬고 싶다’라는 생각만 들 정도로 몸과 마음이 힘들어요. 저 역시 강제로 육아라는 또 다른 ‘일터’로 내몰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집에 오면 편안한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돌리며 하루의 피로를 풀어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에 그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지친 사람에게 육아를 동기 부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실, 저도 육아에 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퇴근하고 오면 으레 “열심히 일 했으니 나는 좀 쉬어야 해.”라고 생각했고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내에게 미뤘어요. 적어도 나의 이 ‘피곤한 몸 상태’가 거짓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힘든 감정’마저 무시하고 ‘육아가 더 힘드니 네가 좀 도와라’라고 일방적으로 접근한다면, 결국 감정싸움으로 번질 것은 불 보듯 뻔하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남편의 ‘자발적인 육아’를 독려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데 꼭 나까지 ‘육아’에 가담하기는 너무 힘들다.”라고 생각하는 남자들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글이 나를 동기 부여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음의 이야기는 좀 더 피부에 와 닿지 않을까요.
저는 의학 전문가도 아니고 생리학자도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100세 이상을 살 것인지 아직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기대수명이 높아질 거란 확신은 있고, 우리의 은퇴 후 삶은 은퇴 전 삶보다 길어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죠. 이에 따라 우리 세대의 큰 고민은 “길어진 은퇴 후 생활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이며, 많은 사람들이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위해 젊어서부터 ‘건강’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도 많을 텐데, 왜 사람들이 특히나 건강에 관심을 가질까요?
100세를 살아도 아프거나 고생스럽게 사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장수로써 진정한 의미가 있죠. 저 역시 행복한 노년의 삶을 생각하다 보니, 건강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요즘 들어 ‘보험광고’가 눈에 띄네요.
TV에 너무 자주 나와, 안 보려 해도 자꾸 보이는 감도 없지 않으나, 요즘 들어 부쩍 관심이 가네요. 특히 그들이 말하는 ‘나이 들어 병들고 아프면 더 힘드시죠? 지금 고민하지 말고 전화 주세요.’라는 문구가 가장 인상 깊습니다. “그래, 젊었을 때 조금 투자해서 미래에 아프지 말고 살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죠.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미래에 아픈 것’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을 병을 위한 투자이므로, 어떤 측면에서는 ‘불확실한 투자’라고 볼 수 있죠. 내가 만일 아프면 도움이 되겠지만, 건강하게 장수한다면 지금 나에게 투자할 자원을 ‘불확실한 미래에 낭비’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작은 투자로 높은 위험을 대비한다는 점에서, 보험은 매력적이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죠. 이쯤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확실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나요?”
여기서 말하는 ‘확실한 미래’란 ‘여러분이 배우자와 100세 이상을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100세를 살아도 아프고 고통 속에 보내야 한다면 의미 없다고 했었죠. 만약, 나의 동반자와 함께 사는 100세가 고생스럽고 힘들 다면, 같이 함께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을까요? 서로를 불신과 미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건강만 지킨다면 ‘같이 100세’를 살 수는 있어도 ‘함께하는 행복한 노년’은 장담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가 민감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17년 초 황혼이혼의 비율은 26.4%로, 4년 이하 신혼부부의 이혼율인 24.7%를 넘어섰습니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노년층들이 갈라서고 있음을 뜻하죠. 최근 증가하고 있는 황혼이혼의 요구는 주로 여성에서 시작되며, 이유는 ‘남은 인생은 나를 위해 살고 싶어서’, ‘내가 힘들 때(가사와 육아)는 모른 채 하더니, 이제와 퇴직해 잔소리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젊어서는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위해 살았지만, 남은 인생은 나를 위해 쓰고 싶다는 것이죠.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우리의 미래가 될 수 도 있기에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내와 살아가야 하는 날은, 우리가 살아온 날들보다 분명 길 어요. 지금처럼 결혼 정년이 늦어지고 있는 추세에서는, 자식을 키우는 기간보다 그 이후의 삶이 더 길 것은 자명하죠.
따라서, 행복한 미래를 위해, 더 이상 힘들어하는 아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는 투자하면서 확실한 미래는 외면하실 건가요? 남편이 아내의 상황을 외면할 때, 그녀는 마음속에서 남편의 자리를 지워갑니다. 그리고 나중에 여러분이 그곳으로 돌아오려고 할지라도, 이미 그 자리는 없어진 지 오래 일지 모릅니다.
혹시, 너무 이해타산적이라 생각되시나요?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났으니 그 마음 오래 지속하자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결혼한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처음 떨리는 마음은 서로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죠. 그러나 부부관계를 지속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노년의 행복한 삶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나쁜 마음 아닌가, 라고요.
최근 ‘졸혼’이라는 형태의 별거부부가 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황혼이혼에 졸혼까지 합한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죠. 앞에서 말한 ‘인간의 기본 욕구 조차 해결할 수 없는 육아’를 지금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땅의 어머니들은 지금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더 늦기 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내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죠. 아내를 위한 남편의 노력은 곧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됩니다. 우리 부부의 행복한 노년을 위한 ‘행복 저축’으로 쯤으로 생각해도 좋아요. 늦기 전에 어서,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