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은 퇴직이 아닙니다
어느 날 문득, 아이를 보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다 엄습해온 무서운 생각이 있습니다. 육아를 하며 생긴 저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넘어가고자 해요. 여성에게는 독박 육아 그리고 우울증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며, 딸을 가진 아빠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옛날처럼 남녀 구분을 가지고 학업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아들 딸 가릴 것 없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원’을 하여, 자녀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려 하죠.
그리고 이런 지원에 힘입어, 아이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갑니다. 그 아이가 졸업 후 ‘취준생’ 시절을 맞이하여, 죽기 살기로 노력해 겨우 취직하였다고 해보죠. 어림잡아 20년가량을 현재의 ‘직업’을 얻기 위해 공부한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떤가요.
지금까지 노력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기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회에서 잊혀갑니다. 이런 우울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니, 차라리 제 딸에게 “이럴 거면 왜, 열심히 노력해 원하는 직장을 가져야 하니?”라고 말해주고 싶더군요. 어차피 몇 년 하지 못하고 그만둬야 한다면, 노력 대비 효율이 너무나 떨어지는 일입니다.
공부가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공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한다’, 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거예요. 그런데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노력해 사회로 진출했는데 남성은 계속해서 자신의 커리어를 키워나가고, 여성은 경력단절을 경험해야 하는 이 현실이, 나의 이야기가 될까 두렵습니다.
딸아이를 가진 아빠로서, 사랑하는 아내를 둔 남자로서,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은 있습니다.
“경단녀도 취직할 수 있다.”, “휴직제도가 잘 되어 있어 휴직 후 직장생활도 보장된다.”라고 말이죠. 확실히, 제도적으로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육아의 대부분은 엄마의 몫이에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배워와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7년을 쉬었습니다”
어느 공익광고의 카피입니다. 7년이란 세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아이들만 보았을 거예요. 묵묵히 자신만의 일이라고 생각한 육아를 마친 뒤, 이제 다시 나의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너무 큰 공백은 그녀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큰 짐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은 경력단절이 아닌, 경력 자체가 없어지는 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젊고 활기찼던 나의 모습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아이 엄마로만 불릴 뿐, 더 이상의 나로서의 존재는 사회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가네요. 돌아갈 곳이 있기나 한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고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문제 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아내의 인생, 그녀에게 희생만 강요하는 사회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만 키우고 나의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한다면, 누가 나에게 이런 희생만을 강요한다면....... 어느 누구도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을 가졌을 뿐, 아이만을 낳고 기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더 이상 여성에게만 당연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집의 사랑받는 딸이었고, 능력 있는 여자였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은 한 사람을 ‘아내’라는 이름하에 ‘육아의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지금까지의 열심히 살아온 ‘그녀의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의 부인, 누구의 엄마이기 전 멋진 여자로서 그녀가 있었고 우린 그 모습을 사랑했어요. 이제 사랑하는 그녀를 지켜줄 때가 왔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여성의 휴직,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한마디를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강요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죠. 그리고 앞의 내용들을 보았다면, 이제 쉽게 휴직해서 육아를 하라고 할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느꼈을 겁니다. 육아 휴직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쉽게 생각하고 결정할 일은 아니죠.
그래서 약속이 중요합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최소한의 것들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휴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분명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아이는 누가 보느냐, 그런 생각을 하면 태중의 아이에게 미안하지는 않냐 또 심하게는, 아이를 사랑하기는 하는 거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육아에서 임신과, 출산 그리고 모유수유를 제외하면, 모두 남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처음엔 조금 서툴지라도 익숙해지면 남자가 더 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만약 아내에게 휴직을 강요하고 싶다면 그전에 남자가 앞서 언급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왜 못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자, 저의 말대로 약속을 받아내셨다고요? 육아를 함께할 동반자를 가지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한 가지 더 못 박아 둘 것이 있어요. 바로 복직에 관한 약속입니다.
육아휴직을 한 것은, 잠시 아이를 보기 위함이지 나를 사회와 영원히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휴직이지, 사직은 아니잖아요.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분명 중요하지만, 더 이상 아이가 전적인 부모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우리도 우리만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휴직은 사직이 아님을, 명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