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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 Soup May 09. 2022

차가운 빗방울, 따뜻한 고기우동

낯선 곳에 정드는 과정

 아름다운 꽃밭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체크인 시간인  시가 넘어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버스도  시간에 와서,   없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올  있었다.


 맡겨 둔 캐리어를 찾으러 가자 호스트는 나를 방으로 안내해줬다. 방에는 이층 침대가 두 개 있는데, 침대마다 미닫이 문이 있어, 작게나마 개인 공간이 보장되었다(미닫이 문이 없었다면 다른 숙소에 갔을 것이다). 내가 예약한 건 이 방이 아니라 일층 침대 하나였다. 침대 옆에 난 작은 창문으로는 원래 후지산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오지만, 내가 갔을 때는 날이 흐린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에 완벽히 가려진 후지산

 호스트가 가자마자 나는 바로 미닫이 문을 닫고, 짐을 풀고, 침대 위에서 발을 뻗었다. 비좁은 공간은 마치 내가 택배상자 안에 든 물건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혼자만의 공간이 주는 안락함이 있었다.

 야마나시에 온 이후로 나는 줄곧 낯선 경치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교환학생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에 익숙해진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혼자가 되니 자유로움보다는 두려움이,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도무지 여기서는 나의 살던 동네처럼 편하게 놀러 나갈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누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갔다.


 눈을 떠보니 저녁 즈음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저녁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아봤겠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이미 야마나시는 나에게 '보란듯이 예상을 벗어나버리는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찾아 둔 식당과 문구점은 간판도 찾아볼 수 없었고, 몇십 분을 기다려도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오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일본은 어딜 가나 편의점 천국이라는 사실! 내 모든 예상을 빗나간 야마나시에도 편의점만큼은 숙소 근처에 여러 군데 있었다. 나는 삼각김밥이나 사 먹을 구실로 밖으로 나갔다.


낮에 찍은 이자카야

 게스트하우스를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이자카야였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사람들이 꽤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낮에 처음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왔을 때도, 나는 이 이자카야에 관심이 있었다. '우동' '라멘' '호르몬' 등이 써 있는, 투박한 동네 술집 내지 식당이라는 느낌. 나는 바로 별점을 보려고 구글 지도를 켰다. 혼자 여행을 할 때는 '구글 지도 별점 4.0을 넘는 식당만 간다'는 나만의 철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식당은 별점은 커녕 구글 지도에 아예 올라와 있지도 않았다. 즉 원래대로라면 나와는 영 인연이 없는 식당인 것이다.

 하지만 왜였을까? 비오는 텅 빈 거리와 반대로 사람들의 이런저런 대화소리가 들려오는 이자카야는 자꾸만 내 눈길을 끌었다. 그러고보니 하루종일 사람하고 제대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대화는 고사하더라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누군가 차려주는 저녁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간판의 '우동'이라는 단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맛이 없거나 불친절해서 기분이 더 다운되진 않을까', '동네 손님들이 혼자 관광객인 날 주목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면서도, '어차피 오늘은 공친 날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투박하고, 생각보다 널찍한 이자카야는, 다인원을 수용할 만한 좌식 테이블과 주방 앞의 카운터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카운터석은 비어 있었고,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을 비롯한 손님들은 좌식 테이블에 일행끼리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인 듯 했다.

 여자 사장님은 요리를 하고 있었고,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알바생이 나에게 몇 명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혼자라고 대답하며 카운터석에 앉았고, 고민할 것 없이 ‘고기우동(肉うどん)’을 주문했다. 이내 알바생이 차가운 얼음물을 가져다줬다. 그런데 들어오기 전의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평소에 부주의한 탓일까. 나는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얼음물을 마시다가 테이블에 왈칵 쏟아버리고 말았다.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알바생이 와서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테이블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다시 주눅이 들 것만 같았다. 사고를 치다니, 역시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조금 오래 기다리고, 우동이 나왔다.

 양배추가 들어간 따끈따끈한 고기 우동.

 국물을 한입 마시니 그대로 긴장이 탁 풀렸다. 고기 우동은 먹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딱 내가 생각했던 맛이라고 느꼈다. 양배추는 달큰했다. 마치 이불처럼 따스하고 푸근한 맛이었다.


 우동을 다 먹은 후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사장 아주머니가 선물이라며 뭔가를 건넸다. 금붕어가 그려진 부채였다. 생각도 못한 선물이 기뻐 저절로 웃음이 났다. 혼자 여행와서는 긴장하고 있던 내 속내를 눈치챘던 걸까? 그냥 외국인이니까 주신 선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장님이 건네 준 그 부채가 내 하루를 살린 것은 틀림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기우동과 부채가, 사장님의 친절이.


 이 식당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의 야마나시 여행은 별 볼일 없는 여행으로 기억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만난 작은 친절과 따뜻함이 나의 야마나시에 대한 인상을, 그 이후의 시간들을 더욱 긍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사람이 가장 비참한 때에 베푸는 친절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어 주는가, 그것을 몸으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시 야마나시에 가게 된다면, 이번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때의 이자카야에 들러 나의 마음이 따뜻해졌던 그 시간을 회상하며 뜨끈한 고기우동을 한 번 더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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