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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 Soup Jun 07. 2022

안녕, 시모키타자와

카레, 빈티지, 커피 플로트

'아주 맛있는 양고기를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같이 열심히 구워서 오로지 맛있게 열중하며 먹는다. 그 과정에 한가득 담겨 있는 행복한 분위기를, 내 정신이 먹는다.'

- 요시모토 바나나, <안녕, 시모키타자와> 중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는 때부턴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좋아했다. 그 중 도쿄의 '시모키타자와'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 <안녕, 시모키타자와>를 여러 번 읽었다. 책에서 느껴지는 작은 동네의 일상감이 좋았기 때문이다.

 시모키타자와는 어떤 동네이길래 이렇게 안정감이 느껴지는 걸까.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마나시에서 도쿄로 올라 온 다음 날은, 시모키타자와를 가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빼 두었다.  


Pannya

 아침을 거르고 왔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동네 구경은 뒤로하고 일단 구글맵스에 별표를 해 두었던 카레집을 찾아갔다.

 시모키타자와에는 카레집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고른 곳은 살짝 빈티지한 인테리어의(물론 시모키타자는 전체적으로 빈티지한 동네이다만), 일본어 리뷰가 많은 로컬 식당이었다.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주황색 조명과 특이한 프린팅 티셔츠가 걸려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젊은 손님들보단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많았고, 만석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손님이 들어왔다.


내가 시킨 건 먹물 돈카츠 토핑의 카레. 진한 일본식 카레에 비하면 스튜 같은 묽은 느낌이어서 처음에는 의아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마 스프카레인 듯하다) 하지만 돈카츠는 아주 바삭바삭했고 커리와 강황밥도 맛있었다.

 식당에서는 계속 올드 제이팝이 흘러나왔다. 특히 내가 주문한 카레가 막 나왔을 때 노래가 내 스타일이었다.


真心ブラザーズ - 遠い夏

진심브라더스 - 먼 여름


うんざりと長い夏  지긋지긋하게 긴 여름

罵り合って口をつぐんだ  욕을 퍼붓고는 입을 다물었어

終わりの予感打ち消して  마지막의 예감은 지워버리고

このまま時間よ止まれ  이대로 시간을 멈춰

ああ遠い夏よ  아아 먼 여름이여

俺をあの日々に閉じこめろ  나를 그 나날들에 가두어 줘



 

 천천히 카레를 다 먹고 나와서, 꽤 다양한 커피 원두를 파는 카페를 발견했다.

 엄마 아빠에게 줄 디카페인(그리고 산미가 없는) 원두를 고르고 십오 분 남짓 기다렸다. 바로 옆에 이어지는 카페도 좋았는데, 가고 싶은 카페가 있어서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밥도 먹고, 선물도 샀겠다, 카페에 가기 전 여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걷다 보니 느껴졌다. 시모키타자와에는 빈티지샵이 많다. 옷, 그릇, 컵, 그외의 무엇이든... 그중에서는 특히 의류가 유명한건지, 개성있게 차려입고 빈티지 의류샵을 여기저기 들어가보며 구경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나도 그들을 따라 몇 군데를 들어가보았는데, 구제라고 가격이 저렴하기보다는 오히려 희소성 때문인지 꽤 가격이 나가는 듯했다. 마음에 드는 검은 원피스를 하나 발견했지만, 가격을 보고 살짝쿵 내려놓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새로운 것보다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 것 같다. '최신형'보다 '20년 된' 같은 수식어를 가진 물건들에 끌린다(전통주 같은 건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희소 가치도 물론 매력이지만, 아주 옛날에 태어난 것들이 좋은 주인을 만나 지금까지 깨끗하고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해왔다는 것도 멋지게 느껴진다.

 빈티지 물건을 산다는 것은, 마치 그 유지행위를 '내가 이어가겠소!'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집안의 가보를 대대로 물려받아 소중히 다루듯이. 어디서 누구를 거쳐온 지는 거의 모르지만 말이다.


유리구슬 10개에 약 천 원!

 그런 의미에서 시모키타자와는 내게 보물찾기 코스와도 같았다.

 기대 없이 들어간 가게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나를 부르는 보물과 만나기도 한다. 난생 처음 보는,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겠는 물건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내 경우 대부분의 물건을 '날 부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문제지만. 이것저것 사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귀여운 프린팅이 돼 있는 빈티지 컵 두 개를 샀다.


 보물찾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잠깐 들른 문구점에서 친구들에게 선물할 엽서를 사고, 세 시부터 여는 카페에 가고 싶어서 조금 서둘렀다.


Jazz & Cafe Hayashi

 시모키타자와에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재즈 카페는, 서너 개의 테이블이 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문을 열 때부터 재즈 음악이 조금 크다 싶을 정도로 쿵쿵 울려퍼졌다. 한국에서 갔던 재즈 엘피 바에서도 음악을 크게 틀었던 걸 보면, 재즈 음악은 원래 가슴에 쿵쿵 울릴 정도로 크게 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테이블이 모여있는 공간 맞은 편의 카운터에서 여자 사장님이 내 테이블로 오셨고, 주문을 받으셨다.


 나는 커피 플로트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위에 아이스크림(주로 바닐라) 한 스쿱 정도를 얹어 주는 음료인데, 교환학생을 하는 동안 좋아하게 된 음료다.

 한국에서는 보통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는다고 하면 아포가토다. 아포가토는 맛있지만, 에스프레소를 아이스크림에 뿌려 먹는다는 점에서 내게는 너무 진하기도 하고, 더울 때 꿀꺽꿀꺽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아니라는 점에서 카페에 가면 잘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커피 플로트는 누가 봐도 음료이며, 중간중간 아이스크림까지 먹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카페에서 커피 플로트를 만난 것은 굉장히 기분 좋았다. 나는 이 곳의 분위기만을 기대하고 온 것이지, 내가 좋아하는 음료가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곳의 커피 플로트는 또 한 번 나의 예상을 깼으니, 그것은..


엄청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마운틴!

 빨대를 꽂지도 못할 정도로, 입구 위로 꽉꽉 쌓여 있는, 그 높이도 엄청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마운틴! 눈이 휘둥그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대체 몇 스쿱이지? 이 글로 커피 플로트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주의하셔야 할 것이다. 원래는 이렇지 않다. 내가 알던 커피 플로트는, 배스킨라빈스 주니어 레귤러 정도의 아주 작고 귀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갈 뿐이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 먹었다. 크게 울리는 재즈, 달콤한 아이스크림! 오감이 만족되며 머릿속에서 행복의 폭죽이 펑 하고 터지는 기분이었다.


 혼자 여행에서는 카페에서 독서라는 사치도 부려보게 된다. 특히 재즈와 책은 궁합이 좋지 않은가? <안녕, 시모키타자와>를 쓴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을 가져왔다. 시모키타자와의 카페에서 아직 남은 부분을 읽고 싶었다. 마침 옆 테이블의 남자 손님도 혼자 책을 읽고 있었던 걸 보면, 이 곳은 시모키타자와 사람들이 책과 재즈를 즐기는 카페인지도 모른다.


 더 여유를 부리고 싶었지만, 전시회를 예약해둔 탓에 아이스크림을 겨우겨우 다 퍼 먹고(이때까지도 바닐라 마운틴을 다 먹지 못했다) 아메리카노를 급하게 빨아들이고 나왔다. 전시회를 예약할 때만 해도 이렇게 이 카페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다!

 아쉬웠지만, 어쩌겠나.

 이게 사는 척 여행자의 한계인 것을.


 집(사실은 숙소)에 와서 시모키타자와 전리품들을 꺼내보았다. 아까 엄마 아빠 선물로 산 원두 봉투를 살짝 열어보니 매우 좋은 향기가 났다. 다음에는 여기서 커피를 마셔봐야겠다.

 이런, 그럼 초대형 커피 플로트는 포기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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