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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

소설가들은 마법사?

by 김설


우연히 어떤 소설가를 만났다. 파주의 어느 카페였다. 운이 좋게도 가까이 앉았다. 소설가의 책이 수중에 없어서 사인을 해달라는 말은 차마 못 했다. 힐끔거리면서 노트북 화면을 보니 빈 문서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작가는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글을 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란 참 신기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한 편의 우주를 만들어낸다.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가져와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로 엮어낸다. 커피 한 잔, 비 오는 오후,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의 표정... 이런 것들이 그들의 손을 거치면 어느새 누군가의 인생이 되고, 사랑이 되고, 모험이 된다. 이기호 작가는 강아지다. 귀엽고 천진한 비숑프리제.

그들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보고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저 잎은 왜 다른 잎들보다 먼저 떨어졌을까?" 저 창은 왜 북쪽을 향해 있을까? 저 사람의 등은 왜 저런 모양으로 굽었을까? 등등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리는 순간들을 붙잡아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발견해낸다.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타고난 재능일까, 아니면 훈련된 습관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과 그 시선을 날카롭게 벼려온 시간이 만나서 탄생하는 마법. 그것이 소설인 것 같다.




소설가들은 게임을 좋아하는 짓궂고 엉뚱한 사람들. 그들은 기력이 없이 더 이상 펜을 들지 못할 때까지 "만약에" 게임을 한다. 만약에 이 사람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만약에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강아지가 사람이 된다면. 만약에 내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이 끝없는 가정법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생물과 사물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때로는 작가 자신도 놀랄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만으로는 소설이 완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제 문장으로 옮기는 과정은 예상보다 고된 작업일 것이다. 완벽한 문장을 찾기 위해 수십 번 고쳐 쓰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밤새 고민하겠지. 수많은 퇴고와 수정을 거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 끈질김이 그대로 드러난 소설이 바로 이기호 작가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이 아닐까. 제목 또한 대단한 무기다. 명랑하고 투쟁 없는 삶인데 짧기까지 하다니.

인간과 동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바꾸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소설이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늘도 작가는 어디선가 빈 종이 앞에 앉아서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고 있을 것이다. 나를 울리고 웃긴 이야기꾼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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