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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서 배운다

by 김설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작가님은 지금껏 살면서 어떤 문제가 가장 힘드셨나요?”다. 그럴 때면 망설임 없이 인간관계라고 대답한다. 지금도 여전히 비슷한 문제로 힘들다고 대답하면 독자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약간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작가라는 사람도 자기와 비슷한 고민거리를 안고 산다니 안심되는 눈치거나.




육십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도 남편 또는 딸과의 관계가 삐거덕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한탄스러운 마음이 들어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사나 싶어진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나 역시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서야 사람은 저마다 다른 세계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결혼했는데도 상대의 말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남편은 내가 쓰는 한국어를 아예 다르게 사용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니, 잠깐만 내 말이 그렇게 들렸다고? 라는 말을 빈번하게 했다. 남편과의 소통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반은 이해, 반은 포기였다. 그래도 같은 여자인 딸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섣부른 기대였다.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깨달음을 얻었어도 후에 행동은 나와 남편, 딸, 모두 달랐다. 그래서 가끔 꿈꾸듯 생각한다. 타인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어떨까? 평안할까? 자기 삶 안에서만, 타인의 세계를 사진과 통계로만 바라본다면, 그 삶은 정말 안락할까?








늦은 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친구에게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는 과정에 있었다. 딸의 목소리에 외로움이 묻어 있어 엄마로서 마음이 아팠다. 누구나 한때 비슷한 경험을 한다. 나 역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고 쓸쓸함을 삶의 기본값으로 생각하며 가족이나 친구와 멀어지자고 다짐한 적이 있다. 한동안 연락을 끊고는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생각했다. 대부분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가 움직여주지 않아서다. 내가 바라는 것을 전부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까워서, 친구이기 때문에 서운한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받은 상처 중 절반은 나니까 너에게 해줄 수 있다며 던진 말이었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랬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기분에 따라 누군가를 낙인찍고 함부로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과 시선에 일일이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이런 특성을 알게 되면서 갈등과 서운함이 생겨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니 그 상황에 내 마음을 조금씩 맞추게 됐다. 이제는 옳다고 생각하는 나름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지켜 가면서 산다. 누군가의 호불호에 따라 나를 검열하지 않고 상대의 판단을 내 판단보다 옳다고 높이 사지 않는다. 미움받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고 호의를 보여 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나도 호응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타인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 삶은 단정하다. 그런 삶이 어느 정도 지속된 후에는 그 자체의 안정된 리듬이 생긴다. 이런 삶이라면 얼마든지 즐겁게 이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따라온다. 고요한 생활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인간관계에서 안정을 찾은 것이 타인과의 접촉이 없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반대였다. 갈등과 번민이 난무하던 그 시간은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었고 타인의 언어를 익힘으로써 나의 언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과정이었다. 그 시간이 나를 성장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사는 사람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도 확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내 자리에 꼼짝도 안 하고 앉아서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라는 위로도 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마음 앞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고 그 사람의 개별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사람에 대한 상을 수없이 상상하고 그려봤다.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타인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했다. 탓해야 할 것은 타인이 지닌 낯섦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지난한 과정에 왜 그렇게 몰두했는지, 이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얻었는지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딸의 질문일 수도 있다. 엄마의 대답은 이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너무도 많은 걸 배웠다. 그 덕에 나와 맞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됐고, 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을 곁에 두며 삶을 확장해 나가고 싶은 꿈도 꾸게 됐다. 실제로 나는 꿈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이 작가는 이런 작가라는 사실의 나열이 내가 아니다. 나의 진실은 남들이 말하는 사실보다 더욱 깊을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제대로 만지지 못한다고 해서 심란해하지 않는다. 앞으로 생이 이대로 흐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왜 내가 인간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썼는지, 동굴처럼 어두운 인간관계에 들어가길 멈추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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