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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Sep 09. 2023

시아버지가 떠나시던 날, 하늘에는 폭죽이 터졌다

스페인이 그렇지 뭐. 가끔 생각보다 뭐가 빨리 진행되면 황송할 기분이 들 정도로 더딘 것에 익숙해졌다. 사실 여기 오래 살다 보니 이제 속 터질 일도 많이 없기도 하다. 너도 느린데 나도 좀 느리게 살지 뭐, 이렇게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한 느낌이랄까. 일요일 자정 넘어, 정확히는 지난 월요일에 주문한 검은 옷은 역시 목요일 낮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다 같이 느리게 살자고 우리 약속한 거 아니었나? 뭐가 급하신지 시아버지의 임종 소식은 옷 배송보다 빨랐다.


지난글 <시아버지 장례식에 입을 옷을 사던 날> 보기


지난 일요일, 나 홀로 마드리드로 돌아가기 위해 시아버지와 인사를 하며 "금요일 되면 다시 올게요!" 했는데 시아버지는 기다리지 못하셨다. 목요일 낮 두시쯤, 스마트폰에 남편 번호가 떴을 때 불현듯 불길한 기분이 들어 인사도 생략한 채 바로 "무슨 일 있어?"하고 물었다. 호흡이 가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은 "아빠가 임종 중이셔."라고 겨우 내뱉었다. 이미 지난 주말 시아버지를 봤을 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고, 그래서 일요일 새벽에 검은 옷도 주문한 건데 막상 그 말을 직접 들으니 눈물이 먼저 터져 나왔다. 회사에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바로 집에 가서 간단히 짐을 챙긴 뒤 가족들이 있는 작은 도시로 출발했다. 정신이 없어 집 문을 닫은 뒤로도 세 번이나 다시 집에 들어가 깜빡한 걸 챙기고 문단속을 확인했다. 생각하지 않으면 머리가 멍해져서 하나하나 행동을 머릿속으로 읽어가며 최종적으로 집을 나섰다. 


GPS를 차 블루투스와 연결하고 차를 출발했는데 블루투스 연결이 잘 안 된 것 같았다. 시간이 하교 시간대여서 학교가 많은 집 주변은 아이들을 라이드 하러 온 차들로 붐볐다. 그 차들 때문에 계속 멈춰야 했고, 멈춰있을 때마다 연결이 안 되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고 재설정을 했다. 그때 누가 "핸드폰! 핸드폰!" 하고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어떤 남자가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거였다. "핸드폰! 핸드폰! 핸드폰 보지 마!! 저기서부터 계속 보고 있어!" 하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창문을 내려 "난 지금 가족이 죽어 가고 있거든? 병원 가는 길을 네비에 입력해야 하는데 설정이 안 돼서 그런다 왜! 남의 사정도 모르면 닥쳐!" 하고 소리치려다 그냥 손에서 폰을 내려뒀다. 차가 멈춰 있었다 한들, 운전대 앞에서 폰을 본 내 잘못이 맞기도 하고 학교 근처라 아이들도 있고, 부적절한 행동은 분명했다.


대신 코너를 돌아 빈 공간에 아예 차를 세우고 연결을 다시 확인했다. 드디어 네비가 정상적으로 연결된 뒤 차를 출발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천사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내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던 아저씨 덕분에 어쩜 큰 사고나 불미스러운 일을 피한 건 아닐까? 시아버지의 임종을 향해 가는 길에 별 생각을 다했다.


평일 낮인데 고속도로가 주말보다 막히는 듯했다. 마드리드 산맥 터널을 지나야 하는데 터널 입구에서 차가 전혀 안 움직이고 막혀 있어 정차한 채로 블루투스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떠셔?"

"조금 전 돌아가셨어."


시아버지의 부고는 차에서 들었다. 이후 두 시간 정도 가는 동안, 화가 났다가 슬퍼서 꺽꺽 울다가 다시 차분해지기를 반복했다. 스페인은 병원에 장례식장이 붙어 있지 않고 별도로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계시던 호스피스 병원은 가지 않아도 되었다. 벌써 장례식장으로 모셨다고 해서 일단 사시는 도시에 도착 후 만나서 같이 이동하기로 했다. 도착한 초가을의 작은 도시는 무척 예뻤다. 멀리서 보이는 대성당의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워 이 풍경을 이제 시아버지는 못 본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남편을 만나 서로 안고 엉엉 울고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도 짧게 영상통화로 서로를 위로한 뒤 장례식장에 갔다.




내가 비록 스페인에선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지만 남편네 가족들 앞에서 이상한 작은 오만함이 있었다. 시댁이 있는 작은 도시와 달리, 난 내내 큰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고 외국여행도 많이 하고 외국에서 공부도 했으며 덕분에 스페인에서 밥벌이하고 살고 있다는 오만함이다. 그러니 내가 비록 이방인이어도 사실 더 많은 걸 경험하고 안다는 착각을 했다. 작은 도시 특유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를 접할 때며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런 생각은 최근 다 사라졌다. 시아버지의 병시중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먼지 한점 없이 집안을 유지하시던 시어머니는 힘들다 내색도 않고, 오히려 마드리드에서 우리가 올 때면 머물 방의 침대까지 호텔처럼 깔끔히 준비하시곤 했다.


남편 누나도 이성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살뜰히 아버지를 돌보았다. 호스피스로 가시기 며칠 전, 거동이 어려워지셨을 때부터는 시어머니와 함께 환자용 바디 물티슈로 몸을 닦으며 아버지의 샤워를 대신했다. 눈썹도 다듬고 다 터버린 마른 입술에는 립밤도 발라 드렸다. 직업이 약사이기에 환자가 필요할 물품을 가장 빠르게 챙겨 올 수도 있었다. 시아버지도 고통이 찾아올 때면 이런 딸에게 가장 의지했다.


나였다면 내 감정만 앞세워 오히려 더 주변을 힘들게 하거나, 아니면 내가 이렇게 가족을 사랑하고 슬퍼하고 고생한다는 걸 티 내기 위해서라도 더 엉망으로 있었을 것 같은데 의연한 와중에도 부족힘 없이 환자를 돌보는 남편네 가족들을 보며 왠지 모를 존경심까지 생겼다.


그러나 아무리 의연했어도 장례식장에서 만난 남편 가족들은 애통해하고 있었다. 그들과 만나 서로를 안고 울고 위로하고 함께 조문객을 맞았다. 친한 조문객과 추억 이야기를 할 때면 간간히 웃기도 하고 눈물이 나면  또다시 서로를 안고 울었다.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예전에는 밤샘 조문이 있었다지만 11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우린 빈소 문을 닫고 장례식장을 나서 일단 집에서 좀 쉬기로 했다. 


날은 시댁이 있는 작은 도시의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장례식장 건물을 나서서 주차장으로 가는데 먼 하늘에서 안 어울리게 폭죽이 팡팡 터졌다. 우리는 모두 잠시 서서 폭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이 죽었는데 웬 폭죽?'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난히 포근했던 가을밤 탓인지 외려 순간 따뜻한 기분이 몸을 감쌌다. 가족들이 최대한 가까운 사람에게만 알리자 했는데도 어떻게 알고 평일 밤에 달려와준 많은 친척, 지인들의 진심 어린 위로 덕분이었을까. 팔순 석 달을 살고 떠나신 시아버지의 생의 완주, 그리고 영원한 안식의 시작을 축하해 주는 불빛 같았다.


그럭저럭 좋은 삶은 사셨다고 했던 시아버지는 그렇게 9월의 맑은 날, 영원히 자유로워지셨다. 평생을 사셨던 작은 도시의 아름다운 폭죽 불빛과 함께.


장례식장을 나서자 터지고 있던 폭죽 (c)이루나




여러분들의 위로에도 시아버지의 가을은 길지 못했습니다. 정신없이 조문객을 맞으며 울고 나니 이튿날은 눈물이 현저히 줄더군요. 슬픔이 덜하다니 보단 위로를 많이 받아서 인 듯합니다. 유가족을 힘들게 하는 번거로운 장례절차는 왜 있는가 싶었는데 모든 건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마지막 화장까지 다 마치고 돌아온 뒤 쓰러져 이른 저녁의 잠을 잤더니 잠이 쉬이 들지 않는 새벽이라 대신 시아버지를 억하며 글을 씁니다. 글쓰기는 제게 언제나 유효한 위로입니다.


장례식장의 유리벽 넘어 시아버지의 관을 보고 있노라니 참 용감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신, 끝에는 고통까지도 참아내신 분이니까요. 전 아주 작은 고통에도 차라리 죽었으면 싶을 때가 많거든요. 이제 저도 용기 있게 살아가려 합니다. 다들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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