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나 Sep 05. 2023

시아버지 장례식에 입을 옷을 사던 날

홀로 돌아오던 마드리드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드리드에 가까워질수록 굵어지던 빗줄기는 마드리드 외곽을 감싸는 산맥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차가 뚫릴 듯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스페인에 살면서 처음으로 주정부의 재난 문자도 받았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차량 사용을 지양하고, 다음 안내까지 집에 머무십시오.>


혼자 운전하며 가는데 이런 문자를 받다니. 익숙한 길이었지만 긴장감에 차 핸들을 두 손으로 다시 꼭 움켜 잡았다. 쉴 새 없이 와이퍼를 돌려도 앞이 잘 안보였다. 곳곳에 사고나 차량 문제로 정차해 있는 차들을 보며 다들 유난히 조심해서 서행하는 게 느껴졌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 어둑한 집안의 불을 켜는 순간, 창 밖으로 천둥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남편네 가족이란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존재일까. 당장 남편과 나 조차도 평생 타인으로 살다가 어쩌다 보니 사회적 계약에 의해 뜬금없이 가족이 되어버린 관계인데, 남편과 함께 졸지에 따라온 그의 원가족과는 서로 적당히 멀게 지내는 게 사실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입장 바꿔 하물며 시아버지는 어땠을까. 예순이 넘을 때까지 한국 사람과는 말 한마디도 안 해봤을 양반이 늦둥이 막내아들이 데리고 나타난 어린 한국 여자애를 엉겁결에 가족으로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주요 명절이면 만나고 종종 같이 밥을 먹고 또 가끔 여행도 함께 가는 가족이 되어버렸다. 모든 건 다 어쩌다 보니.


그래도 나는 시댁 식구 중 시아버지가 제일 편하고 좋았다. 평생 농장을 운영하셨던 시아버지는 은퇴 후에 농장 땅의 대부분은 세를 주고, 본인이 좋아하는 사냥을 하고 쉴 수 있는 작은 부지만 남겨 놓으셨는데 사시사철 아주 더운 여름 말고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셨다. 결혼 후 첫가을에 소풍 겸 그 농장을 처음 놀러 가던 날, 어디서 구하셨는지 시아버지는 태극기를 긴 막대에 매달아 농장에 세우시곤 나를 보고는 멋쩍은 듯 웃으셨다. 이상한 표현 같겠지만 마치 대견한 일을 한 아이가 어른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시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도 천진한 아이 같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한 번은 내가 애완 고슴도치에 빠진 적이 있었다. 분홍 뱃살에 조그마한 손발이 너무 귀여워서 애완 고슴도치를 기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 소문이 어떻게 시아버지 귀에 들어갔는지, 하루는 농장에 갔더니 고슴도치를 잡아놨다는 것이다. 자랑스럽게 내민 조그마한 우리 안에는 내가 생각한 분홍 뱃살의 고슴도치가 아니라 두더지만큼 크고 시커먼 야생 고슴도치가 있었다. 내가 원하던 고슴도치가 아니란 걸 알고 시무룩하던 시아버지의 상심을 틈타 그 덩치 큰 고슴도치는 우리를 탈출해 도망갔다. 우리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농장만 가면 "그때 그 고슴도치가 인사도 안 하고 가버렸다"며 몇 번이고 깔깔댔다.


가족들은 괜히 남 좋은 일만 한다고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치과 의사인 친구가 의료기기가 말썽이다 싶으면 전문 수리기사가 아닌 시아버지께 부탁할 정도로 손기술이 좋으시기도 다. 덕분에 우리 집에도 자잘한 수리할 게 있으면 마치 출장 기사처럼 2시간 반 거리를 달려서 마드리드에 오시곤 했다. 남편이 정기적으로 병원 검진을 다닐 때가 있었는데, 그 병원을 데려다주려고 매번 또 마드리드에 오시기도 했다. 이게 다 운전 못하는 며느리를 뒀기 때문인데, 이 운전 못하는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오시면, 옳다구나 하며 다음날 차로 출근을 시켜달라고 졸랐다. 당시 다니던 회사 근처에는 큰 회전교차로가 있었는데, 회사를 가기 위해선 그 회전교차로 쪽으로 가야 해서 우리는 거길 '루나 회전교차로'라고 불렀다. 그 며느리가 지난 일요일에는 재택근무가 가능해 시댁에 남기로 한 남편만 두고 출근을 위해 혼자 운전해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 시아버지께 인사하러 가자 혼자 운전해서 간다는 걸 들으시곤  "이제 자립적인 사람이구나" 라며 마른 입을 떼며 말씀하셨다.


또 시아버지랑 나는 비슷한 점도 많다. 둘 다 반주를 좋아하고 밤에 늦게까지 깨어있는 걸 좋아하고 또 한때 같은 게임을 좋아했다. 식사할 때 늘 와인 한두 잔을 곁들이던 시아버지의 흥을 맞춰주는 건 언제나 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흥에 시아버지가 맞춰주었다. 또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아빨라브라도스(Aplabrados)라는 낱말퍼즐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서 밤늦게까지 온라인에서 만나 게임을 하곤 했다. 내가 먼저 게임에 질려서 그만뒀는데, 시아버지는 내가 더 이상 같이 게임을 하지 않는 걸 못내 아쉬워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하몽 뒷다리를 하나 통째로 사서 마치 굉장한 의식처럼 손질하시고 직접 자르셨는데, 나는 그 옆에서 시아버지가 자르는 족족 날름날름 주워 먹곤 했다. 난 비계 부분이 싫으니 살코기 부분으로 잘라달라고 구체적인 부탁까지 하면서. 그래서 자르다가 비계가 많이 섞이지 않은 부분이 나오면 "이건 루나가 먹으렴" 하고 따로 챙겨두시곤 했다. 그런 양반이 2년 전 크리스마스 때부터 "앞으로 얼마나 많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으려나" 혼잣말처럼 내뱉으셨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3달도 더 남았는데, 올해도 시아버지가 잘라주는 하몽을 먹어야 하는데.


시아버지가 크리스마스면 직접 썰어주시던 하몽 (c)이루나


지난해부터 시아버지를 성가시게 하던 건강 문제는 올 초 수술로 나아지리라 기대했었다. 팔순의 나이에 견디기 쉬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 아무도 지금처럼 시아버지의 병세가 급속히 악화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첫 번째 수술 후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수술을 했고, 그렇게 온몸을 해집어 놓은 병원은 돌연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으니 하지 않고 앞으로는 통증 완화 치료만 하겠다'라고 선언하듯 말하곤 시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게 여름이었다. 휴가 때 이런 소식을 접해, 휴가 끝나고 찾아뵌 시아버지는 이미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고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큰 수술로 살이 많이 빠지셔서 그럴 거야, 그러니 잘 먹으면 다시 회복하실 거야. 모두 그렇게, 그때는 그렇게 서로를 위안했다.


허나 잘 드실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살은 계속 빠지고 건강은 더욱 빠르게 악화되었다. 보통 나이가 많으면 나쁜 세포도 힘이 없어 병이 느리게 진행된다는데, 연세가 있으신 분이 이렇게까지 빨리 악화될 수 있다는 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매일매일 눈에 띄게 몸이 안 좋아지셨다. 지난 주말, 화장실을 가려던 시아버지가 시어머니와 남편의 부축만으로는 벅차서, 시어머니의 만류에도 나까지 나서서 부축하는 와중에도 의식을 자꾸 잃으셔서 결국 거의 질질 끌다시피 다시 침대로 옮겨야 했을 때, 우리는 모두 암묵적으로 다가올 상황을 인지했다.




'찬 물방울'이라는 뜻의 고따 프리아(gota fria)가 마드리드에 왔다. 주로 가을 무렵 형성되는 차가운 고기압으로 강한 비를 동반한다.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여름은 힘을 내지 못하고 가을로 계절이 넘어간다. 따스한 봄날 같았고, 또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는 여름 같았던 시아버지의 계절도 가을로 가서 저무는 중인 듯하다. 계절이 이렇게 가고, 세상이 이렇게 도는 일을 막아본 이가 있었으랴. 새삼 이 모든 아픔을 먼저 겪었을 이들이 존경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차가운 비가 쏟아지던 마드리드를 달려 집으로 혼자 돌아오던 날, 깨끗이 씻고 손톱과 발톱을 정리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검은색 옷을 주문했다. 생각해 보니 변변한 검은색 옷이 없는 것 같았다. 언제라도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달려가 마지막 인사를 할 거다. 혹시나 허둥지둥하느라 늦게 가거나 엉망으로 가지 않으려고 그렇다. 다만 시아버지의 저무는 가을이 조금 더 긴 가을이었으면 좋겠다. 가을은 예쁘니까, 누구나 길게 지나가길 바라는 그런 계절이니까. 그렇게 어쩌다 보니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번만 더, 시아버지가 있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 모든 건 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듯이. 이번에도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스페인에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전 한국식 가족 호칭이 어색해요. 언제부터인가 결혼도 단지 유효하는 동안에만 유효한 계약같이 느껴져 관한 이야기는 잘 하고 싶지 않아 졌어요. 별로 색다르거나 재밌을 만한 구석도 없는 이야기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글은 쓰고 싶었어요.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질 것 같아 저를 위로하며 쓴 글입니다. 오늘 이 글을 쓰며 많이 울었어요. 어쩌면 완벽한 타인 같은 존재이기도 한 시아버지는 제게는 꽤나 따뜻하고 좋은 어른입니다. "이제 자립적인 사람이네"라고 하신 말이 제가 사는 동안 오래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