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여러 사람이 합심해 일궈놓은 수도원 텃밭 소식이 들렸다. 신부님의 표현 그대로 '죽지 못해 살고 있던' 텃밭이 비가 몇 번 내리고 여름이 되자 무섭게 먹거리를 내어 주는 중이다. 그런데 불청객처럼 작물 사이사이로 잡초도 날로 무성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퇴비를 뿌리고 갈아둔 텃밭에 모종을 심는 건 3일 치의 근육통을 안겨줄 만큼 고되고 힘들었는데 심지도 돌보지도 않은 잡초들은 어떻게 그렇게 알아서 잘 자라는지, 괜히 잡초 같은 생명력이라 하는 게 아니었다. 최근 신부님께 안부를 물으면 늘 텃밭에 잡초를 뽑으러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호미도 없는 스페인에서 허리 숙여 손으로 잡초를 골라내는 게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되어서 묘책이랍시고 신부님께 던진 말이 고작 저거였다. 잡초 다 없애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라.
유치원생도 안 할 소리를 해놓고 아차 싶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어이없게도 '신부님이니까 하느님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이 실제로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어진 신부님 대답은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님께 해달라고 기도하면 안 돼요."
모두 힘을 합쳐 일궈둔 수도원 텃밭 (c)이루나
사실 난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을 가졌던 게 아니라 버릇이 잘 안 들기도 하고, 이상하게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딴생각이 많이 떠올라서 금세 다른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나마 하는 기도도 돌이켜 보니 대부분 희박한 기적을 바라는 기도이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님께 떠넘기는 기도가 많았다. 이젠 이따금 수도원 텃밭의 무성한 잡초가 떠오를 때면, 하느님께 잡초를 다 없애 달라는 부탁 대신 이런 기도를 한다.
"하느님, 오늘 수도원 식구들이 잡초 뽑을 때 조금 덜 힘들기를, 무성한 잡초도 수월히 뽑히기를, 혹시 힘이 들어도 잘 견디며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와 연결되어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우연히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 박미옥 형사님의 책 '형사 박미옥'에 대한 팟캐스트를 들은 적이 있다. 책에 서술한 사건들을 책 구절과 같이 읽으며 되짚어보는 북토크 형식의 팟캐스트였다. 사건 자체와 전개 그리고 형사님의 역할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사무쳤던 것은 팟캐스트 말미에 전한 형사님의 당부였다.
세상을 살면서 범죄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결코 해주지 못한다. 다만 그런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꺾이지 않고 극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최근 주변 가족과 지인들이 큰 병과 싸우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진을 받은 나 또한 심각하진 않지만 성가신 혹들이 늘어나고 새롭게 생겨난 것을 보고 마음이 잠시 철렁했다. 내 자신과 또 가까운 이들의 일이다 보니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늘 하루아침에 병이 싹 낫게 해 달라며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하지만 기적보다 더 가까운 위안이 있다.
오늘 하루 병에 지치지만 말고,작은 행복도 느끼기를.
사랑하며 사랑받는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기를.
그리고 그 안에서 평온하고 충만하기를.
이곳에서 글로 소통하는 달리는 신부님도 며칠 전 나의 글에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라는 말보다 '아프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고 힘들어도 너무 상심하지도 마세요'라는 위로를 전해주셨다. 내 마음과 너무나 같은, 그리고 최근 큰 슬픔을 겪으신 신부님께 내가 드리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내 마음은 자꾸만 기적을 바란다. 그럴 때면 지난봄 행복했던 수도원 마을의 텃밭을 떠올린다. 또 박미옥 형사님의 말과 달리는 신부님의 말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되뇌어 보는 것이다.
잡초가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라는 건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잡초를 뽑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인생에 힘든 일이 없기를 바라는 건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힘들어도 꺾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건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파도 너무 상심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