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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르 Nov 19. 2018

<영주>, 모든 관계에는 입장이 있다

브런치 무비패스 #23


<영주>, 모든 관계에는 입장이 있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영주(김향기)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자 동생 영인(탕준상)의 보호자로 힘겹게 살아간다. 6년이 지난 지금 갑자가 가해자가 궁금해진 영주는 주소를 알아내고 그들을 찾아간다.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는 가해자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 영주는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되고, 사고를 친 동생의 합의금을 훔치려다 상문의 목숨을 구해주는 일을 계기로 향숙의 애정을 받게 된다. 부모를 죽인 가해자가 마치 부모처럼 영주를 돌봐준다. 이 상황이 혼란스럽지만 행복하기도 한 영주. 동생 영인은 그런 영주에게 정체를 밝히고 그들의 진심을 마주하라고 한다.


소재 자체로는 대단히 흥미롭다. 교통사고로 우리 부모를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가게 일하게 됐는데, 나의 어려움을 알아본 그들이 조건 없이 도움을 준다. 처음에는 분노와 호기심으로, 그다음에는 연민으로, 마지막에는 호감으로 바뀐다. 부모의 부재를 그들이 대신 메꿔준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사람에 대한 부채의식일 수도 있고 원래 선하고 따뜻한 사람이어 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뭐건 영주에게는 부모의 빈자리를 대신해줬다. 따뜻했고 편안했다. 나를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거다. 하지만 그것도 영주가 자신이 누군지 밝히기 전까지다. 서로의 존재를 알아버린 이후엔 관계가 변한다. 어떤 관계든 마찬가지다. 각자의 입장이란 게 있을 테니까.



영주는 힘들었다. 중학교 때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을 돌보며 6년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보호자가 되어야만 했고 책임감과 중압감으로 세상을 버텨야 했다. 동생 영인이는 계속 엇나가기만 한다. 아직 중학생인 영인이는 결핍된 가정의 문제적 청소년기를 고스란히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주는 그런 세상이 싫다. 자신들을 남겨두고 갑자기 떠나버린 부모도 밉다. 그러다 법인이 궁금해졌다. 주소를 확인하고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



사고를 친 영인이의 합의금을 내준 것은 의외로 그들이다. 부모를 죽인 사람들. 하지만 지금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영주를 딸처럼 살갑게 대해주고 잘해주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잘 살아보려는 영주가 기특하기도 하고 아파서 누워있는 자신의 아들에게 못해준 애정을 대신 쏟기도 한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는 점도 크다. 돈을 훔치러 가게에 들어온 영주는 갑자기 쓰러진 주인집 아저씨를 발견한다. 신고를 하면 영주의 행각이 밝혀지지만 그대로 돈만 가져가면 아저씨는 죽을지도 모른다. 영주 역시 착한 선택을 한다. 부모를 죽인 운전자지만, 비록 자기가 돈을 훔치러 들어온 게 들통나지만 사람을 살리는 선택을 한다.



<영주>는 사람들의 속내에 대한 얘기다. 영주는 어린 나이에 한 집안의 가장이자 동생의 보호자가 됐다. 아무도 자신을 케어해주지 않았고 동생은 사고만 친다. 그러다 만난 가해자의 부인에서 부모님의 애정을 느낀다. 자신에게 부재한 부모라는 자리를 주인아주머니는 과하게 채워준다. 난생처음 누구로부터 보호를 받고, 관심을 받고, 걱정을 듣는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행복하다. 가게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 하지만 그 가게의 아저씨는 자신의 부모를 교통사고로 죽게 한 가해자다. 자신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오게 만든 사람들, 하지만 지금은 영주에게 월급을 주고 애정도 준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고마움과 만난 영주는 혼란스럽지만 자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나쁘지 않다.



가해자 아저씨는 죄책감 속에 살아간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의식을 잃고 누워만 있는 아들이 자신의 죗값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말하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아주머니는 그런 아저씨를 안쓰럽게 생각한다. 그게 다 자신들의 업보라고 생각하며 갚으며 살겠다고 한다. 그러다 영주를 만났다. 그리고 마음으로 영주를 받아들이고 잘해준다. 도움을 주고 애정을 쏟는다. 아들에게 주지 못한 애정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죄의식에서 발현된 행위기도 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대가 없이 조건 없이 그런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주가 자신의 존재를 밝혔을 때 모든 것이 뒤집힌다. 조건 없이 주던 애정은 이제 대가로 보일 수 있게 됐고, 세상을 향해 품었던 죄의식은 영주를 대상으로 한 죄의식으로 바뀐다. 그저 딸 같아서 좋았던 영주지만 이제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람이 된 거다. 아무렇지도 않게 영주를 대할 수가 없다. 영주에게도 이제 부모의 부재를 대신하던 존재가 없어졌다. 잠시나마 누구의 보호를 받고 관심과 애정을 받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모든 관계는 깨졌다. 비록 의식이 없어도 누워만 있는 주인집 아들이 부러울 지경이다. 자신은 다시 보호자로, 가장으로 이 매서운 세상에 맞서 혈혈단신 나아가야 한다.



사람의 인연이나 관계는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내 부모를 죽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가 하면, 그들에게 딸처럼 대우를 받지만 정작 그 모든 걸 밝히고 솔직해진 이후로는 서로를 기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진심을 다할 수가 없다. 선의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조심스럽다. 마음을 주기만 하는 관계였지만 이제 그 마음에 대한 피드백을 확인해야 한다. 진심을 보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영주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차라리 알리지 말걸. 그저 순수하게 자신을 잘해주던 주인아주머니였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만다. "이제 영주를 어떻게 보죠?"



영화는 상황과 설정을 잘 가져오긴 했지만 흐름은 급하다. 심리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클로즈업을 많이 사용한 탓에 화면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사건도 급하게 벌어진다. 가해자의 주소를 알아내고 찾아가서 바로 같이 일하게 되고 며칠 만에 아저씨를 살리면서 동생의 합의금을 지원받고 그 뒤로 아주머니는 영주를 딸처럼 대한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동생이 아저씨의 존재를 알고 영주가 자신의 존재를 고백한 후 관계는 끊어진다. 짧은 기간에 일어나기에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너무 큰 일들이다. 감정적인 변화가 잘 설명되지 않으니 이야기만 따라가기 급급하다. 모든 사건이 임팩트가 있어 흥미롭긴 하지만 너무 굵직한 이야기 하나에 모두의 감정을 섞어 놓으니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진다.


김향기의 선택이 나쁘진 않았다. 자신을 원톱으로 한 독립영화에서 연기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었을 거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좀 단순하게 다뤄진다. 사건 전개를 위한 캐릭터 정도 거나 영주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부수적인 역할 정도다. 원톱 영화라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감정적 임팩트가 있는 사건이 빠르게 전개되니 인물이 잘 보이진 않는다.


(사진 제공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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