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더니 옛 어른들 말 하나 틀린 게 없다. 저녁을 뭘 먹을까 한창 고민했다.
근처 유명하다는 물회집에서 물회를 포장해서 와인바에 갈까?
시장 가서 먹거리를 사들고 와인바에 가서 먹을까?
한창 고민했지만, 차마 음식을 포장해서 와인바에 갈 용기가 안 났다.
그냥 먹고 가자.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양산으로 막으며 터벅터벅 물회집으로 향했다.
노포 느낌이 낭랑했던 곳, 널찍한 홀 안에 손님은 나 하나였다.
세상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이라니.
좌식세팅이 된 곳조차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요즘 추세에
이런 아날로그 함이라니.
머쓱하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처럼 혼자 오는 손님이 꽤 있는 곳이었던 건지, 메뉴판엔 1인을 위한 메뉴가 볼드체로 크게 써져 있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기본 물회로 시켰다. 오징어 물회가 먹고 싶었는데 오징어가 잡히지 않아 그건 어렵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지.
기본 물회를 하나 주문하고 3초간의 정적 뒤 다시 외쳤다.
"사장님 맥주도 카스 한 병 같이 주세요!"
쿵쾅쿵쾅 심장이 뛴다.
처음이었다.
식당에서 혼밥은 여러 번 해봤어도 식당에서 하는 혼술은 처음이다.
멋지게 소주를 마시는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내게 소주는 정말
공업용 알코올이라 도저히 친해지기 어려운 술이다.
그렇다고 혼자 소맥을 타 마시기엔, 오늘의 하이라이트 와인바가 남아있으므로 맥주로 혼자 합의 봤다.
덜덜덜 카트에 물회와 반찬, 그리고 맥주가 실려왔고
비닐이 잔뜩 깔린 상 위에 하나 둘, 음식이 놓였다.
"육수 넣지 말고 드시다가 마지막에 육수 부어서 드시면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혼자다.
이 넓은 식당에 나와 음식, 그리고 저 맥주 한 병이 끝이다.
펑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맥주를 땄다.
황금빛 액체가 탄산을 잔뜩 머금은 채 차가운 잔에 졸졸 담긴다.
상 위에 놓인 초장을 좀 더 넣고 슥슥 젓가락으로 물회를 비볐다.
색이 어느 정도 빨개졌을 때 즈음, 젓가락으로 크게 집어 한 입에 와아아 넣었다. 아삭아삭 야채와 부드러운 회, 새콤달콤한 회가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이때인가.
맥주잔을 들어 꼴깍꼴깍 황금빛 액체를 목 뒤로 넘겼다.
목을 치는 탄산감, 혼자 식당에서 술을 마셔봤다는 쾌감,
바르게 살아왔던 내 삶에 스스로가 던지는 나만의 작은 일탈,
그로 인한 짜릿함인지 , 맥주의 탄산인지 술이 달았다.
핸드폰도 내려둔 채 식사에 집중했다.
오물오물 씹으며 눈앞에 골목의 풍경을 지긋이 쳐다봤다.
입안의 음식맛을 골고루 느끼며 먹어본 게 언제더라.
이 맛에 사람들이 혼술 하는구나.
식당에서 혼자 먹으면서 술을 시키다니, 나 제법 멋진데.
쾌감, 뿌듯함, 즐거움, 편안함, 맛의 유희, 삶의 유희
모든 게 뒤섞인 채 나를 감싸 안았다.
남들이 봤을 땐, '저게 겨우 일탈이라고?' 하겠지만
술을 찾아마시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혼술이라고 해봤자
집에서 맥주 한 두 캔 까는 게 전부였던 내게 , 혼밥은 해봤어도
식당에서의 혼술은 흔치 않은 내게 이런 경험은 그 자체로 생경했다.
혼자서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새파랗게 어렸던 20대 초반, 혼자 떠난 일본여행에서 초밥에 먹었던 생맥주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어른의 맛이란 이런 건가.
조용한 침묵 속에 음식과 술을 넘기며 곰곰이 생각하는 것.
음식의 맛을 생각하다, 삶을 생각하다, 지금의 나를 바라보다
또 과거를 반추하다 목이 막힐 때쯤 술로 내려보내는 것.
맥주 한 병으로 그날 나는 꽤 많은 감정과 어른의 정의에 대해 생각했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어둡다'
그게 내 첫인상이었다.
바테이블에 앉은 손님 한 분과 사장님을 제외하면 들리는 건 음악소리가 전부였다.
머쓱하게 들어가 바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받았지만, 와인을 하나도 모르는 나는 추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드라이한 맛이 적은 샴페인 느낌의 달달한 와인'
첫 추천은 모스카토였지만 모스카토는 꽤 마셔봤기에 딱히 끌리지 않았다. 로제와 화이트 중 고민하다가 사장님이 레드는 어떠냐고 하셨다. 사실 제대로 레드를 마셔본 적이 없어 나는 덜컥 겁먹었다.
그간 내가 '레드와인'에 대해 들은 악평은(?)
'먹고 나면 머리가 정말 아프다'
'레드와인은 숙취가 너무 오래간다'
'레드와인은 떫은맛이 너무 강하다'
등등 온갖 악평이 많았기 때문이다.
곰곰이 고민하다 그냥 추천 와인을 먹기로 했다.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저 혼자 와인바에 가보는 게 목적이었으니.
[Toso Fiocco di vite Brashetto d'Acui]
매끄러운 유리병이 놓였다.
좁고 긴 유리잔에 쪼르륵 선홍빛의 와인이 찰랑거렸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한 입.
달다.
달았다. 정말 달고 바디감이나 탄닌감이 없었다.
레드와인이 이렇게 달 수도 있구나.
혼자 마시기에 적당한 도수와 달달함.
금세 기분이 몽글몽글 해졌다.
사장님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셨는지, 나는 어쩌다 여길 왔는지.
혼자 오는 손님들은 주로 뭘 하다 가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그런 스몰톡이 이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강한 나로서는 스몰톡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혼자 여행 가면 정말 말할 일이 없으므로
이런 스몰톡이 종종 간절할 때가 있다.
잔잔바리로 이어지던 스몰톡이 조용해질 때쯤
갖고 갔던 미도리노트를 꺼냈다.
여행 가서 일어난 일, 생각한 모든 것을 이 작은 노트에 쓰겠다며
챙긴 노트였다.
그날 있었던 일들과 모든 감정들을 조곤조곤 노트에 써 내려갔다.
날이 흐려서 아쉬웠고, 숙소에서 울었고, 물회가 맛있었으며,
와인까지 맛있다는 말. 사람은 자기가 겪는 상황에서 보는 건지, 외로워서 운 게 아닌데 갑자기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며 온 위로 아닌 위로에 잠깐 황당하였던 순간, 나를 속 시끄럽게 하던 인간관계에 대한 단상, 문득 A의 얘기는 귀담아 들어주면서 B의 얘기는 듣지 않았던 스스로를 깨달았던 시간, 그러다 용기가 생겨 '통화되니?' 네 글자를 토독토독 보낸 것, 그마저도 용기가 부족할까 봐 핀란드에 있는 친구에게 갑자기 '나 용기가 필요해 용기 좀 줘'라고 보냈던 것까지.
혼자 와인바에 가서 한 일 치고는 정말 많은 것을 쓰고 또 썼다.
뭐 이렇게 할 말이 많고 쓸 말이 많은 건지.
스스로도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였나 싶었다.
한 병을 마시니 또 한 병 마실까 고민됐다.
떠나온 이상 돈아 끼며 지내지 말자 싶었으니까.
또 다른 와인을 추천받고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시간을 봤다.
언제 숙소에 가야 하지, 숙소 가는 길이 외진 건 아니지만 밤길은 위험하니까.
결국 한 병만 비우고 계산을 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습했다. 조금은 서늘하기도 했다.
강원도의 바람은 벌써 서늘하구나.
술만 마시면 달달한 게 당겨 항상 아이스크림이든 빙수든 먹었는데
단 술을 먹고도 단 게 댕기다니. 식욕이란 뭘까 생각하며 배스킨라빈스로 향했다.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터벅터벅 숙소에 들어왔다. 라운지에서 하이볼을 한 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꺼내 들었다.
분명 와인 마실 때는 용기가 가상했는데, 왜 점점 사라지는 건지.
나는 친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는 게 좋을지.
다홍빛의 와인을 따라 새빨개진 머리를 부여잡고 '감정이 상하지 않게 대화하는 건 뭘까'에 대해 끝없이 생각했다.
그날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분명 술김에 용기를 빌어 시작한 건데, 이상하게 정작 얘기를 할 때쯤 술은 다 깨있었다. 맨 정신에 얘기하는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