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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22. 2024

퇴사하고 뭐 하면서 지내?

7. 생일을 맞아 강릉으로 도망쳤어 (3)

울고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슥슥 눈을 벅벅 닦고서 자리에 앉았다.

이 상황이 어이없고 웃기면서도 동시에 때론 분출해야 하는 감정도 있구나, 손으로 쓰는게 아닌 온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감정도 있구나 생각했다.


나에 대해 알아가면서 새로 알게 된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자 다 울었니?할 일을 하자" 의 태도였다.


울었으니, 이제 할 일을 해야지.

입고왔던 원피스를 벗었다. 날도 흐리고 사진찍을 마음도 없고

편하게 돌아다니고 싶었으니까. 챙겨온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우산이 없어 양산을 챙기고 가방에 이고 지고 온 소지품들을 내려뒀다. 네이버 지도를 키고 [고래책방]을 검색했다. 걸어서 3분


뭐야 완전 럭키비키잖아!


눈물로 시작한 퇴사 후 강릉 첫 날이 시작됐다.


-


작년 경주여행 때, 그 지역의 독립서점을 들렀다.

'어서어서'에서 책 두권을 소중히 껴안고 돌아왔다.

놀러간 여행지의 독립서점을 들리는 것.

꽤나 기분좋았던 기억이라 이번에도 들려야지 생각했다.


고래도 좋아하고 책도 좋아하는 내게 무려 [고래책방]이라니.

안가볼 수가 없는 거 아닌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양산으로 막고 터벅터벅 네이버 지도를 보며 고래책방으로 향했다.


은은하지만 적당히 밝은 조명.

가판대에 주인장의 큐레이션대로 뉘여있는 많은 책들

한 켠엔 내 눈을 사로 잡는 다양한 고래 모양의 굿즈들


이곳이 천국이구나, 나 여기 오려고 왔구나!


울적했던 기분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책을 추천하는 소개지를 꼼꼼히 읽으며 무슨책을 살까 룰루랄라

서점안을 휘저었다.


에세이? 인문학? 철학? 시집? 만화책?

'두꺼운 인문학, 고전 이런거 갖고 가지 말고 에세이 읽어!'라고

귀엽게 호통치던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인문학과 철학 서가를 제치고 에세이 코너에서 한창 어슬렁거렸다.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에세이 만큼 작가의 역량을 타는 장르도 없는 것 같다. 같은 일상 이야기인데 누구의 이야기는 감정을 울리고 위로가 되지만, 또 어떤 이야기는 '일기장에 쓸 법한 글이군' 하고 책을 탁 덮어버리게 된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장르. 쉽지만 쉽지 않은 장르.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달까.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꼭 강릉의 독립서점에 있다면 데려와야지 했던 '아무튼 디지몬'이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 한 권! 이걸 살까? 고민했는데 읽은지 얼마 안된 터라 다른 책이 읽고 싶었다.

그렇게 서가를 어슬렁 어슬렁 거리다 초록색의 책이 눈에 띄었다.


[김영하 - 여행의 이유]


생일기념이라고 거하게 포장했지만 사실상 나도 왜 떠나왔는지 모를 이곳, 여행에 대한 큰 감흥도 감정도 없는 내가 갑자기 후다닥 도망치듯 온 이곳, 왜 왔을까 저 책을 읽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런 단순한 호기심이 일었다.


반듯한 새 책을 꺼내들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손 때가 묻었는지 봤다.

클릭 몇 번이면 책에 굿즈에, 심지어 할인된 가격까지 모든걸 누릴  수 있는 온라인 서점을 뒤로하고 여행지에 와서 이렇게 '굳이' 사는 책이라니. 낭만은 비효율에서 온다지.

몽글몽글 차오르는 낭만을 자르르 느끼며 책과 굿즈 코너에서 고래 스티커를 유심히 관찰하다 몇 개 집어들었다.

아끼지 말고 써야지. 다짐하며


결제를 하고 [고래책방]이 새겨진 쇼핑백에 책과 굿즈를 담아 나오는 길, 비는 부슬부슬내렸고 하늘은 흐렸다. 옷은 가벼웠고 덥지 않은 날씨에 기분이 좋았다. 팔랑팔랑 쇼핑백을 흔들며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네이버 블로그와 숙소 도착 후 봤던 소개지에서 본 물회집에 가기 위해서. 아무래도 혼자 여행하다 보면 밥먹는게 좀 문제긴 한데, 1인도 무난히 받아주는 곳이라니, 심지어 서점과 가깝다니

오늘 하루 정말 럭키비키 그 자체군


팔랑팔랑 나비가 날아다니듯 나는 물회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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