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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04. 2022

[에로스의 종말] 3장 - 벌거벗은 삶

                    


 먼저 3장의 제목인 '벌거벗은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책에는 벌거벗은 삶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사용한다. 하지만 나처럼 이 용어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문외한도 있다.


 '벌거벗은 삶'은 철학자 아감벤이 쓴 [호모 사케르]에 등장하는 용어다. 나무 위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고대 그리스 단어로 직역할 시 '신성한 인간'으로 정의 상 누구나 죽여도 살해의 책임을 지진 않지만, 희생물로는 바쳐질 수 없는 존재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그냥 먹고사는 문제(오이코스)만을 해결하면 되는 동물이 아니라, 폴리스(공공)에서의 정치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폴리스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닌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아감벤은 이 개념을 자신의 철학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둔 것이다. 즉, 추방령을 당한 상태의 사람은 '호모 사케르'가 되며, 추방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자를 두고는 '주권자'라고 정의한다.


 폴리스라는 정치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생물학적 생명은 소유하나 정치적 생명은 없는 존재다. 오늘날 우리 사회로 따지만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과 비슷하다. 이들 노동자들은 고용주가 임금체불, 폭행 등 불법 행위를 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법적 조치를 취하려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불법이므로 불가능하다. 법적, 정치적으로는 죽은 존재와 마찬가지다.


 '벌거벗은 삶(생명)'은 이렇듯 살고는 있으나 법적 권리는 상실해버린 존재들이다. 인간에게 있어 법적 권리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인간은 그 권리를 입고 있어야 사람 대접을 받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권리가 없이 맨몸으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 그런 사람이 사는 삶이 '벌거벗은 삶'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 2장에서 모든 이질성을 제거한 자본주의의 긍정성에 갇힌 현대인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삶을 바꾸어 줄 타자를 상실한 채 성과사회에 갇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폭로했다. 3장에서는 그런 현대인들이 벌거벗은 삶을 살고 있다는 비판을 덧붙이려 한다.


 사랑은 본래 한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빼앗아 버린다. 사랑은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전복적 힘을 가진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랑은 그런 힘을 잃어버렸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사랑은 소비할 수 없다. 백화점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돈으로 살 수 없다. 연인을 상품목록에 올릴 수 없다. 본래 사랑은 상품처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하기에는 위험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이란 오늘날의 사랑의 공식은 현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병철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끌고 온다. 이 개념 역시 자세한 설명이 없다.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이끌어나간다. 그래서 다시 헤겔의 이론에 대한 설명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온 비교적 쉬운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은 둘만 있어도 하나는 주인, 하나는 노예, 즉 주종관계를 이루기 마련이다.
2. 사람은 모두 주인이 되기 위해 서로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을 한다.
3. 이 투쟁에서 죽을 각오로 임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노예가 된다.
4. 그러나 인간관계는 계속 변화, 발전하는 변증법적 관계이다. 주인과 노예는 어떤 순간 뒤바뀐다.
4-1. 노예는 자기 한계를 자각하고 주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발전시킨다.
4-2. 주인은 노예에게 모든 것을 시키므로 결과적으로 노예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4-3.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자립적인 주체가 된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묘사한다.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정, 독립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된다. 그는 죽음의 위험 대신 노예상태를 선택한다. 오늘날 벌거벗은 살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한병철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소비사회, 성과사회에 굴복한 노예같은 현대인의 삶의 특징을 '건강에 대한 집착'에서 찾는다. 오늘날 건강은 모든 사람의 관심이다. 오늘날 소비상품 중 가장 중요한 카테고리를 점하는 것은 '건강 관련'이다. 의학정보, 건강 식품과 의약품이 여기에 속한다. 건강에 좋은 옷을 입고, 집에 살아야 한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 스트레칭, 요가, 음악 등의 여가 생활에 힘들게 번 돈을 아낌없이 소비한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건강에 좋은'은 만병통치약이다.


 이런 건강에 대한 집착의 저변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그 두려움 때문에 현대인들은 노예의 삶을 선택한다. 그 두려움 때문에 노예의 삶을 영원히 연장하려 건강에 집착한다.


 건강에 집착하는 노예는 정신적으로 노예상태가 되고 만다.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다. 정신이 생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정신적 능력과 생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인의 특성이다. 노예의 정신은 주인처럼 건강하고 생동감을 가질 수 없다.

헤겔의 노예는 의식이 제한되어 있다. 그의 의식은 절대적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의식이 제한된 노예는 열등하다. 무엇보다 "절대적 결론을 맺을 수 없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여기서 책상 서랍에 늘 사직서를 두고 살아가는 직장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사 앞에 사직서를 던질 상상을 한다. 하지만 사직서를 내던지며 결론을 맺지 못한다. 그리고 성과사회의 명령에 질질 끌려가며 생존을 유지한다.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에 좋은 건축재료로 지은 집에서, 건강에 좋은 운동을 하고, 의학정보를 모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얻은 건강을 벌거벗은 삶을 살아가는데 활용한다. 그리고 성과사회는 건강한 노예를 오랫동안 착취할 수 있다.


 이제 교사의 눈으로 이 책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용기'를 가르치고 있는가? 언제부턴가 교사는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사회에 적응할 것을 지상가치로 가르치고 있지 않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좋은 대학을 가며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가식을 빼고 우리의 모든 교육의 목표는 결국 좋은 대학, 성공한 삶이 아닌가? 이런 가운데 학생들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라는 사회에 널리 통용되는 삶의 목표, 가치관을 따라가되 언젠가 한번은 모든 것을 송두리채 잃을 각오로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순간에 학교 교육은 학생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또 한 가지 벌거벗은 삶, 노예로서의 의식은 정신에 생동감을 빼앗아간다. 공부, 학문 연구가 정신적 노력과 추구라고 하자. 오늘날 학생들은 열정과 호기심을 갖고 공부를 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뭘까? 결국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기 위한 결단과 용기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교육, 특히 공교육이 학생들에게 '삶의 전복'만을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의 존속'만을 유일한 교육적 가치와 목표로 삼는 것 역시 문제 아닌가? 따라서 교육은 이제 성과사회가 제시하는 성공한 삶과는 다른 '대안적 삶의 모습'도 가르쳐야 한다. 그런 삶이 실패한 삶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주인인 주체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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