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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04. 2022

[에로스의 종말] 2장 - 할 수 있을 수 없음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었다. 그 말을 듣다가 하는 나이가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버릇없는 젊은이에 대한 한탄이 피라미드 안의 벽에 있는 낙서에도 나왔다는 사실이다.


 '버릇없다'는 말에는 기성세대의 규율에 대한 집착이 스며들어 있다. 인간은 사적 공간이든 공적 공간이든 상관없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집단의 규모가 몇 사람이 모인 소규모이든, 국가와 사회를 포괄하는 대규모이든 가리지 않고 어떤 규율이 존재한다. 그 집단에 새로 소속되려 하는 신참들은 아직 낯선 규율에 서투를 수밖에 없다. 그런 서투름에 대한 불만이 '버릇'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신참들에게 함부로 '버릇없다'란 말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어떤 고참이 버릇 운운하면 순식간에 꼰대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 신참들 역시 예전같지 않다. 예전에는 어수룩하고 서툴렀다. 그래서 선배나 고참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요즘 신참은 많은 경우 고참보다 더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집단에 들어오기 위해 준비기간이 길었다. 고참들보다 경험치가 떨어질 뿐 능력이나 지식은 오히려 능가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와 발전의 주기는 불과 몇 년 전의 첨단을 금새 낡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예전과 같은 규율에 의지하는 집단은 순식간에 도태되고 만다. 이제는 어떤 집단이든 규율이 아니라 능력이 우선시된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적어도 능력과 성과가 있으면 인정받는다. 규율이 우선이던 사회는 성과 사회로 변했다.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 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 그러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 이로써 지배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규율사회에서 하급자들은 규율의 부당함에 뒷담화로 막서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신참, 하급자들은 규율의 무게를 '뒷담화 연대'로 견디어 내었다. 그런데 이런 뒷담화도 마음대로 하기 어려워진 것이 요즘이다. 언젠가부터 동료들이 뒷담화를 하려는 사람을 불편해 하는 게 느껴진다. 그럴 시간 있으면 자기 개발에 시간을 투자해야 현명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뒷담화는 패배자나 하는 것이고 고참, 상급자보다 더 철저하게 조직의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 인싸의 조건이다. 아직은 과도기이나 이런 변화의 추세는 뚜렷하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실패는 모두 개인의 책임이다. 누구의 탓도 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간다. 그럼 실패한 사람은 모든 게 내 책임이라는 죄책감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실패의 이유가 외부, 타자가 아닌 자신에게 있다면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또한 내가 실패를 극복했다면 그 실패의 극복을 누구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런 죄사함의 기회가 없다. 자살율이 증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병철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채무의 탕감도, 보상도 모두 타자를 전제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유대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보상의 위기와 채무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을 이룬다. 자본주의는 종교일 수 없다. 종교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데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줄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타인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화해 버린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일을 한다. 예전에는 회사에서만 업무 압박을 느끼다 퇴근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런데 이젠 퇴근 이후에도 하루 24시간 업무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다 실패하면 치명적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 실패의 구렁텅이를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어디까지가 구렁텅이인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실패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이젠 되었다고 실패의 책임을 벗어던지게 해줄 타인도 없다.


 바로 이 지점이 한병철의 에로스가 필요한 곳이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해야 만 한다는 성과사회에서 벗어날 동력이 에로스에 숨겨져 있다. 에로스는 성과사회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통로와 다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사랑이라면 왜 사랑은 한병철의 말대로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걸까? 성과사회에서도 사랑은 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상품이나 물건도 있다. 종교나 학문 추구에 열정을 태우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조차 성과사회의 감옥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걸까?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타자가 아니라 상품일 뿐이라고. 연인도, 상품도, 정신적인 가치와 미래의 꿈도 모두 상품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뿐이다.


 이 성과사회의 상품 논리는 시간까지 집어 삼킨다. 성과사회 이전 사람들은 미래를 구원의 시간으로 믿었다. 지금은 불행해도 미래의 언젠가 이 모든 불행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으로 현재를 견뎌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현재에는 없는 새롭고 낯선 어떤 사건과 계기가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가능했다. 그 낯설고 새로움이 나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미래에 대한 믿음도 사라졌다.


이용 가능한 현재는 동일자의 시간이다. 반면 미래는 절대적으로 경이적인 사건을 향해 열린다. 우리가 미래와 맺는 관계는 아토포스적 타자, 즉 동일자의 언어 속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다. 하지만 오늘날 미래는 타자의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모든 재앙을 차단한 긍정성,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사라졌다면 과거는 어떤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있었던 것을 그대로 다시 눈앞에 떠오르게 해주는 단순한 복원의 기관이 아니다. 있었던 것은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기억은 앞으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서사적 과정이며, 이 점에서 데이터 저장 장치와 구별된다.


 이 책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아마 역사의 힘이 상실되었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과거, 즉 역사는 현재를 반성하고, 그 반성의 힘으로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추동력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역사를 읽는 현재를 변혁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는 살아있는 서사적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젠 역사도 그런 힘을 잃어버렸다. 그냥 저장장치에 저장되는 데이터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학교를 돌아본다. 학교는 여전히 규율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교칙을 따라야 한다. 학생답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생,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 교사는 끊임없이 이 사실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러한 인식이 교사의 훈계가 아니라 학생 스스로 내면화한 가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조금 시야를 넓혀보자. 학교의 우등생, 모범생이 자연스럽게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서 스스로 성과를 내는 삶, 성공한 삶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양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속한 회사나 집단에서 성과를 내며 성공한 삶을 살아가다 회의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성과가 진정한 행복이 아닐 수도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될 수 있다.


 학교가 규율사회의 첨병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학교는 어쩌면 성과사회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성과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아웃사이더적인 삶을 살라고 부추기는 것이 옳은가? 어려운 문제다. 학교와 교사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다.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 그저 학생을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으로 만드는 데 그친다면 불필요한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학생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면 꼭 필요한 고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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