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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04. 2022

[에로스의 종말] 1장 - 멜랑콜리아

                    



 언제부턴가 영화나 드라마에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시절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지금보다 가난해서 부족한 것이 많은 시절이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시절을 화면과 스토리로 소비한다. 벗어나서 다행인 지긋지긋한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정돈된 상태에 안심하는 차원이 아니다. 과거에 비해 현재가 얼마나 풍요한가를 즐기는 느낌이 아니다. 그 시절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이 더 우세하다. 무엇 때문일까?


 과거와 현재, 그 사이에 심연이 놓여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그 심연의 한 가운데 IMF를 거치며 달라진 우리의 경제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경제를 규정하고 대규모 구조 조정을 거쳐 정규직보다 계약직, 임시직으로 일자리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며 우리의 일상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것은 경제체제의 변화를 넘어 우리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 놓았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까지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금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가? 그때는 개인적인 차원이든 국가와 사회적 차원이든 어떻게 바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언제 생각하지 못한 역사적 태풍이 불어와 모든 것을 바꿀지 몰랐다. 삶의 곳곳에 예상을 뛰어넘는 어떤 힘의 존재를 느꼈다. 그 낯선 힘이 언제 나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삶의 모습으로 바꿀지 몰랐다.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기대감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젠 다르다. 어디에서도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 같은 느낌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국가-사회적 차원에서도 예전과 같은 혁명적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루하다. 영원한 현재에 갇힌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현재 질서를 이루는 경쟁 체제에서 뒤쳐지지 않고자 하는 욕망만 가진다. 영원한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즉 갑작스런 질병으로 죽음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몸에 좋은 음식에 집착하고 운동에 몰두한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지루함'이 오늘을 규정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지루함의 이유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책의 첫 부분에서 결론을 내린다. 현대인들은 정열을 잃었다. 뜨겁게 사랑하고 자신을 그 사랑의 대상에게 온전하게 던질 수 없다. 연못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는 신화 속 나르시스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사랑할 수 있는 타자는 사라지고 자기 자신을 감옥으로 만들고 그 감옥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에로스란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의 대화록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토포스'(atopos)로 불린다. 'a'는 '없다'는 부정어다. 이 부정어가 '장소'를 뜻하는 'topos' 앞에 붙어있다. 그래서 아토포스는 장소가 없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를 아토포스라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친숙한 장소에 속하지 않는 낯선 인물이라는 의미다. 소크라테스는 '타자'였던 것이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아토포스’(atopos)로 불렸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소비사회다. 모든 것을 소비한다. 상품 뿐 아니다. 사람의 얼굴, 신체, 정신, 건강까지도 상품화한다. 상품으로 소비하려면 소크라테스와 같은 타자여서는 안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타자성이 사라져버리고 긍정성만 남았다. 이제 세상에 낯선 것은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며, 나의 삶을 송두리채 삼켜버릴 대상이나 사건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는 연인을 선택할 수 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학벌과 재산을 기준으로 세밀한 등급으로 나눠진 사람들 중에 사랑하고 결혼할 사람을 고를 수 있다. 그런 사랑의 선택은 철저하게 합리적이다. 과거처럼 모든 걸 뒤로 제쳐두고 오로지 사랑에몸을 던지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상품을 고르고 소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지고 말았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이러한 인정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자신의 에고 속에 더 깊이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성공 우울증이 발생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한병철에게 에로스란 모든 것을, 심지어 사랑까지 상품화하여 소비하는 현대 소비 사회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열쇠말이다. 성과를 내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타인으로부터 듣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화하여 자기 스스로를 끔찍할 정도로 옥죄는 성과사회에서 해방시킬 힘이 에로스다.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킬 구원자다.


 모든 것이 불안했고 예측하기 어려웠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이유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더 이상 혁명적인 변화와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현재의 지루함, 삶의 답답함의 이유를 에로스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호와 외침이 이 얇은 책에서 들려온다. 그 외침에 나는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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