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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May 07. 2022

스스로를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할만큼

 '원수'(怨讐)란 어떤 존재일까요? 한자 '원'(怨)은 "저녁(夕저녁 석)까지 몸을(㔾병부 절, 이미 이) 이리 저리 뒹굴며 마음 (心-마음 심)속으로 원망한다."(출처)는 뜻입니다. 낮에 만났던 타인에 대한 미움이 밤까지 남아 온전하게 쉴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 미움과 원망이 얼마나 큰지 몸을 땅바닥에 뒹굴 정도로 처절한 지경이라는 말입니다.

한자 '수'(讐)란 새 두마리(雔)가 서로 대화하듯(言) 마주보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원수인 두 사람은 밤이 되어 헤어져 각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미움은 꿈 속에서까지 바로 눈앞에서 서로 노려보고 있듯 생생하다는 것입니다.


 원수란 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감옥이 되는 존재입니다.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 나를 가두는 존재가 원수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원수가 한 명 정도는 있지 않나요? 피곤한 몸을 눕히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능력을 무시하고 이유없이 험담하는 동료, 오로지 지위의 힘에 기대 강요만 일삼는 상사, 내 안전과 생존에 직간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타인들... 그들에 대한 미움이 마치 내 마음의 멱살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잠들 수 없고, 숨이 막히고 영혼이 답답한 그런 경험이 한 번 쯤은 있지 않으신가요?


 "원수를 사랑하라." 성서에 있는 말입니다. 성서에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이것만큼 유명한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원수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도대체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수란 미움과 증오의 대상인데 사랑하라니요.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품으라는 말입니다. '애증의 관계'란 말이 있지 않냐고요? 하지만 이런 관계는 사랑이 우선되는 관계입니다. 미움은 사랑에 종속되어 있는 관계죠. 엄격하게 말해 사랑의 관계지 원수 관계가 아닙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성서에 담긴 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 불가능한 일을 '사랑하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 해결하는 듯 보입니다. 가능한 많은 타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 '가능한'의 영역을 원수처럼 불편하고 미운 사람들까지 넓히라는 가르침으로 따르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받아들이면 진짜 원수를 만나면 신의 가르침이 가지는 힘이 무력해지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 문화권 속에서 원수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의 예를 찾아보기 아주 쉽습니다.


 혹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지금은 도달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표로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태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기까지 인격적으로, 혹은 종교적 신앙인으로 노력한다는 시도는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원수는 현재적입니다. 바로 지금, 내 삶의 중요한 곳에 원수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미움과 증오는 나를 잠 못들게 합니다. 어떻게든 해치워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속에 죄책감이 쌓입니다. 당연히 미울 수밖에 없는 원수를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더 나아가 사랑하기까지 해야 하는 데 그걸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집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은 스스로에 대한 미움으로까지 확산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종교는 경전이나 신의 명령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종교는 내 마음과 영혼을 신이 사로잡아 이끌어야 합니다. 신의 가르침으로 먼저 내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바뀐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행동이 경전이나 신의 가르침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수를 사랑하라."에서 무게 중심을 '원수'가 아닌 '나'로 옮겨보고자 합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할까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해야 내가 더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사람,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그 이유가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칼날은 원수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그 칼날은 원수보다 나 자신을 더 다치게 합니다.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건 마음 속 보이지 않는 그의 멱살을 잡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의 멱살을 잡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 원수의 얼굴에서 자신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증오는 자기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어 스스로를 숨막히게 만드는 감정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내 미움과 증오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내 영혼이 편해지게 될 겁니다. 원수가 어찌되었건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내가 미움과 증오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원수로 인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얻는 순간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원수는 내가 상처받고 파괴되고 고립되기를 그 누구보다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원수의 바람을 보기 좋게 꺾을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신은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원수에 대한 미움으로 스스로 멱살 잡힌 사람들, 그로 인해 만들어진 감옥에 갇혀 자기 삶의 기회와 가능성을 마음껏 펼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신의 바람 때문 아니었을까요? 신은 결국 인간의 행복을 바랄 것이므로 (혹은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란 뜻을 가진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과 증오는 멱살잡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좁은 시야와 같습니다. 바늘만큼 좁은 구멍으로 보이는 곳에 내 모든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면 그 바늘구멍으로부터 눈을 돌려야만 합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 넓은 시야는 원수를 무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합니다. 바늘구멍 속이 세상의 전체였으나 세상에 대한 넓은 안목은 바늘구멍 속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란 말은 "더 넓은 안목을 가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라."란 신의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킬 자신도 없습니다. 그런 바람보다는 나 자신을 원수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를 잠 못들게 할만큼 미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만큼 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시도는 해 보아야 겠습니다.


 원수, 미움, 용서, 사랑에 대해 쓸데 없이 긴 말을 늘어 놓았네요. 제게 무슨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달할 능력이 있어 한 말은 아닙니다. 제가 이런 문제에 어떤 해답을 찾은 사람이라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냥 인생의 힘든 문제로 인해 아픈 별 볼일 없는 사람의 넑두리와 같은 일기장으로 읽어주세요. 그리고 혹시라도 저와 같은 문제로 힘들어하는 분들 중 저와 달리 좀 더 지혜롭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만큼 충분한 능력과 의지력을 가진 분에게 조금이라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귀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교정(校正)이란 한자어를 풀어 설명하는 글입니다. 써 놓은 글에서 잘못된 것을 찾아 고치는 교정이라는 한자어에 원수의 '수'자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위 사진은 교정을 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서로 읽어주고 의논하며 힘을 합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수'는 둘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었죠.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 지금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원수는 내 삶에서 잘못 쓰여진 글자를 찾아내고 고치기 위해 마주보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통해 네 삶을 교정하라."란 말과 같은 뜻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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