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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04. 2022

[에로스의 종말] 5장 - 환상

                    


 4장의 핵심어가 '전시'라는 개념과 '아감벤'이라는 철학자였다면, 5장의 핵심은 '정보', '에바 일루즈'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아픈가]라는 책에서 근대 이전에는 정보가 희박하여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정보가 부족하니 실제보다 과대평가를 하고, 실제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여 이상화하게 되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을 이런 경우에 쓰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과다한 정보가 주어진다. 넘치는 정보는 누군가를 이상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인다. 더불어 이들 많은 정보는 선택의 자유를 증가하게 하여 욕망을 합리화한다.


 예를 들어 여행계획을 세운다고 하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다양한 여행지들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여행계획에는 가야 할 장소, 볼거리, 먹을거리 등에 대한 엄청난 정보들이 쌓인다. 충분한 정보가 모이면 이제 최종 여행지를 선택하고, 어디서 잠을 잘 것인지,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고른다.


일루즈는 선택의 자유가 증가함에 따라 욕망의 "합리화"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한다. 욕망은 더 이상 무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을 통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일루즈는 여기에 '소비문화'가 욕망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덧붙인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 상상하는 삶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 상상 속에는 값비싼 상품이 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상 속의 삶의 모습은 '백화점'을 벗어나기 어렵다. 백화점을 뛰어넘는 상상 속 삶이 있어도 그것은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까지 벗어날 수 없다.


근대적 자아는 자신의 소망과 감정을 점점 더 상상적인 방식으로, 즉 상품과 매체 이미지를 통해서 지각한다. 그의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소비재 시장과 대중문화에 의해 규정된다.


 일루즈의 이론을 간략하게 정리한 한병철은 이제 비판을 시작한다. 일루즈는 "욕망의 합리화"를 말했다. 선택 결정권과 기준의 증가로 인해 욕망이 합리화되었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욕망이 합리화된 것이 아니라 "종말'을 맞는다고 비판한다.

욕망이란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결여의 부정성이 욕망을 자라게 한다. 욕망의 대상인 타자는 선택의 긍정성 속에 붙잡히지 않는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수 백명의 리스트 중 누군가를 선택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자신만의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선택한 한 명을 만난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의 이유를 합리적인 선택을 위한 판단 목록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경제력이나 학벌과 같은 스팩들이 만남까지 이끌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또 다른 차원에서 생겼을 것이다.


 호감, 좋은 느낌, 원활한 대화와 같은 주관적인 차원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낳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은 상대방에 대한 완벽한 정보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 정보들은 가려져 있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상대방에 대한 결여된 정보로 인해 사랑에 빠진다. 끝까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결혼까지 하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을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에 빠져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여서 보지 못하는 것이 있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즉 사랑에는 환상이 필수다.

정보로 충만한 고선명 영상은 아무것도 불확정적인 상태로 놓아두지 않는다. 하지만 환상은 불확정적 공간 속에 거주한다. 정보와 환상은 서로에 대해 대립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타자를 "이상화"할 능력이 없는 "조밀한 정보"로 이루어진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콩깍지가 씌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어야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설 속 이야기를 끌어온다.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마차 속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암시만 하는 에로틱한 소설 장면을 소개한다. 그리고 눈병으로 일시적인 시력 상실 상태인 주인공이 여자 마법사와 사랑에 빠진다. 시력을 되찾은 주인공은 환상을 잃어버린데 절망하며 자기 눈을 찔러 못 쓰게 만든다.


사물의 내밀한 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이 시작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카프카의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그런데 오늘날 과도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차고 넘친다. 눈을 감을 수 없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눈을 감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되어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다. 쉼 없이 성과를 추구하느라 번 아웃에 빠지는 성과주체들이 바로 현대 사회의 "충혈된 눈"이 아닐까?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며 이번 장을 마무리한다. 현대사회에서 예술과 문학, 정치는 무력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리고 돈으로 대표되는 자본에 갇혀있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 국경의 철조망이나 장벽은 더 이상 환상을 자극하지 못한다. ... 경제적 법칙만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지옥을 관통한다. ...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요즘 학생들이 제일 못견뎌 하는 것은 "심심함"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며 시간을 채워야 한다. 시간과 시간 사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휴대폰을 꺼내 든다.


 심심한 시간, 멈춤의 순간이 없는 학생들이 자라 "성과사회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리고 평생 멈춰서서 눈을 감고 깊은 사색과 반성에 빠지는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쉼표 없는 음악은 소음처럼 피곤하다. 인생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지 못한 채 소음만 가득채우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소비사회가 제공하는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는 쉼없이 새로운 욕구를 만든다. 그 욕구를 쫓다가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발전하게 만들 타자를 만날 기회를 잃는다. 인생을 바꿀 스승이나 학문과 같은 자신이 모르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를 만나지 못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소비사회가 만든 가짜 욕망, 갇힌 욕구가 타자라는 존재에 대한 욕망까지 걷어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삶을 개척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며 평생을 보낼 수 있다.


 학생들에게 멈춤의 시간, 눈 감음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화상 원격 수업을 할 때 하루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 보느라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잠시 눈을 감아요. 피곤한 눈을 쉬게 하세요. 아니면 창문을 열고 파란 하늘을 보거나 나무가 보이면 초록색을 눈으로 흡수하세요.


 이젠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언제, 어떻게 눈을 감게 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언제 여기가 아닌 먼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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