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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18. 2022

『사람, 장소, 환대』 : 1장 사람의 개념


 1장은 '사람'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쉬운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개념이고 '사람'은 사회학적 개념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고 한다. 사회학적 개념이다. 누구나 사회 속에서 차별이 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당위를 말한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의 평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는 모두 '인간'이지만, 사회학적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차이 혹은 차별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생물학적 '인간'이 사회학적 개념의 '사람'이 되려면 타인의 인정을 받으며 자격을 획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사람이 되려면 '자격'이 필요하다. 


 단군신화에서 곰은 사람 웅녀가 되기 위해 동굴 속에서 21일간 쑥과 마늘로 버티는 자격 증명이 필요했다.  호랑이처럼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1장에서는 서두에 이렇게 '사람과 인간'을 구분하고, 인간이나 사람이 아닌 존재들에 대해 설명한다.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가 여기에 속한다.왜 이들이 인간이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인지를 설명하며 '인간의 개념'을 명확하게 만든다. 즉 사람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사람 아닌 것을 설명하는 논리 전개 방식을 활용한다.


 아래에서 이 책의 설명을 요약하고자 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다.


1. 각 부류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유

2. 1을 설명하며 끌어들인 사례가 주는 추가적인 시사점(여기서는 나름대로의 생각과 느낌을 덧붙일 생각이다.)



1. 태아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는 인간이지만 아직 사람이 아니다. 


 첫째, 법적으로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 법은 인간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의 지위를 얻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는 독립된 인간이 아니라 엄마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런 이유로 낙태는 살인행위가 아니다. 태아가 죽으면 죽은 사람에 대한 의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둘째, 관습적으로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태아가 출산을 거쳐 신생아가 되자마자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전통사회의 관습은 달랐다. 신생아가 사람이 되려면 '문지방 단계'가 필요했다. 세례나 백일잔치와 같은 통과의례를 거쳐야 사람이 된다. 그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영아를 살해하거나 버리는 것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시사점 1 : 낙태와 사회적 성원권]
'낙태 허용'을 둘러싼 논쟁의 저변에는 태아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법적인 의견 차이가 깔려 있다. 낙태 금지를 법제화하려면 태아를 사회적인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관습과 통념이 전제되어야 한다. 생명을 해치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피상적인 논리만으로는 낙태 허용에 제대로 반론을 펼칠 수 없다.
[시사점 2 :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의미]
"미국인들이 개와 말을 먹지 않는 것은 소나 돼지와 달리 개와 말에게는 이름을 붙여주고 말을 걸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여주고 부른다는 것은 상대방이 사람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들 중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저기요'라고 하거나 경우 '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와 같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상대방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례한 언행을 꺼리낌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생각해 볼 것은 식당이나 가게에서  "사장님", "어머니", "이모"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 데 이는 이름이 아니라 사회적 직업이나 관계에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는 상대방의 개성과 인격은 상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사회적 역할만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무튼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시사점 3 : 사라진 통과의례]
신생아가 사람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거치는 통과의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통과의례가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루어지는 세례나 백일잔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성인식도 통과의례다. 이는 과거 사회에서는 사람으로서의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계가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통과의례는 사회 구성원들이 해야 하는 역할과 누릴 수 있는 권한을 동시에 부여해 주었다. 일종의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는 이런 통과의례가 사라졌다. 이는 어느 정도 사회적 질서와 규범의 와해라는 현상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한국 사회에는 통과의례 역할을 하는 것이 수능시험이 아닌가 싶다. 수능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며 이후 성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권한을 누릴 것인지가 결정된다. 이렇게 변형된 통과의례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2. 노예

 "노예는 태아와 같다." 왜냐하면 노예는 태아처럼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낙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노예를 죽이는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 바깥에 있다. 


노예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지켜야 할 체면 또는 명예가 없다는 것,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얼굴 유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편에서 노예의 얼굴을 고려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 다른 말로 하자면, 노예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예는 그 존재 자체가 무시된다. 노예는 태어나지 않은 존재이므로 가족이나 친족 집단도 없다. 법적 인격도 갖지 못하므로 재산을 소유하거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도 없다. 즉 노예는 로마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인은 언제나 복수형, 즉 '주인들'이라고했다는 점이다. 주인이 노예에 대해 가지는 권력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 


주인들은 '우리'를 만들 줄 알았기에, 권력이 있고 지배할 수 있다. 반면 노예는 고립되어 있기에 무력하다.

[시사점 4 : 왕따의 가해자와 피해자]
씁쓸하지만 왕따 현상에서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책에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왕따에서 가해자들은 복수인 '우리들'이다. 그에 비해 항상 왕따는 고립된 개인이다. 권력이 우리들에 있기 때문에 왕따는 저항하지 못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외 제 3자에 속하는 학생들은 이 권력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들'에 속하려 한다.  이렇듯 왕따의 가해자는 주인, 피해자는 노예와 비슷한 존재다.


[시사점 5 : 얼굴없는 노예]
노예는 사람이 아니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얼굴이 없다. 그럼 우리 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얼굴이 없는 존재'는 누구일까? 처음 떠오르는 사람들은 남자 화장실의 여자 청소부가 아닌가 싶다. 이성이 화장실에 들어오면 난리가 나기 마련이다. 단, 청소하시는 분들은 예외다. 사람들은 이 분들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소변기 앞에 선다. 눈에 보이지 않고 얼굴이 없는 것처럼. 이렇듯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없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이들을 노예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이 노예라고 사회 구성원 전체가 인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작업복을 입고, 그들의 일터에 있을 경우에만 눈에 보이지 않고 얼굴이 없을 뿐이다. 작업복을 벗고 일터를 벗어나면 그들은 다시 눈에 보이고 얼굴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정된 공간에서의 노예 상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3. 군인

 전쟁터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현대전에서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적군은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는다. 적군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군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죽여서는 안된다. 항복하는 순간 그들은 군인(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무기를 버린 적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전쟁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은 국가 간의 대결에서 인간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며 단지 병사일 뿐이다. 그런데 항복을 하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바뀐다. 더 이상 국가 간의 대결에 참여한 병사가 아니라 인간으로 바뀐다. 그래서 항복한 군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전쟁에서 군인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된다는 사실은 훈련소에 입소하는 순간부터 훈련병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기합과 얼차려 등 일체의 훈련 과정은 전쟁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는 그들이 사람이 아닌 물건 취급을 받는데 익숙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 자체가 굴욕을 초래하는 입속의 의례들, 사적인 공간과 개인적인 물품들의 박탈, 다양한 형태의 신체적 침범, 신체적.도덕적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관행들, 특정한 자세나 동작의 강요, 획일적인 시간표, 체벌과 조롱....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며 그의 자아 이미지를, 나아가 자아 자체를 왜곡시키는 이러한 테크닉들은 모든 종류의 '총체적 시설'에서 나타나는 데, 군대도 물론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프먼 [수용소] 중, 43쪽에서 재인용)

 군인에 대해 다루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과거의 전쟁과 현대전의 차이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현대전에는 과거의 전쟁에 있었던 명예의 관념이 사라지고 없다.


 과거에 있었던 결투에 대해 생각해보자. 결투는 명예가 걸린 싸움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명예를 뺏는 것이다. 그래서 결투를 할 때 비겁하게 뒷통수를 때려 제압하거나 죽이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다. 상대방을 때려 눕힌 자가 명예를 잃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쟁들은 결투와 마찬가지로 명예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래서 군인들은 명예를 잃을만한 비겁한 일을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비겁한 승리는 결국 패배와 같다. 패배하더라도 명예를 지키면 결국 승리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장수나 지휘관은 항상 전쟁터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앞장 섰다. 비겁하게 부하들 뒤에 서 있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예 전쟁은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 서로를 대표하는 장수들의 일대일 대결로 전쟁의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주경철의 [대항해시대](서울대학교출판부, 2008년)에는 서구 열강이 비유럽 세계를 손쉽게 식민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총포의 힘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에 있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유럽인들의 공통점은 더럽게 싸우고(즉 의식을 지키면서 싸우지 않고) 더 나쁜 것은 죽이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주경철의 책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과거와 달리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한다. 옛날의 전쟁, 즉 명예전에서 참전하고 살아남아 돌아온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와 전쟁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아무런 이야깃거기로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물건으로 소비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사점 6 : 전쟁과 명예]
전쟁에서만 명예가 사라졌을까? 현대 사회는 모든 경쟁과 싸움에서 명예의 관념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오로지 상대방을 제거하고 이기는 것만이 목적이므로 비겁한 승리로 명예를 잃는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승리에서는 무용담이란 있을 수 없다. 숨기고 싶은 비겁한 승리의 치부만 남을 뿐이다.



4. 사형수

 사회계약론에서 사형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계약은 계약을 체결하는 당사자들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계약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형은 사회계약에 참가한 한 사람을 없애는 것이다. 따라서 사형은 사회계약의 틀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체사레 베카리아는 사형이 사회계약에 포함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베카리아가 제시하는 첫 번째 논거는 다음과 같다.사회계약은 개인이 자기 재산과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자기 생명을 타인에게 맡기는 계약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첫 번째 논거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으로 인해 그 대가가 클 경우가 있다.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배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카리아는 두 번째 논거를 지시한다. 즉 생명은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이전에 신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관념이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계약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로크 역시 사형이 사회계약에 포함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베카리아와는 반대로 사형을 정당화하려 한다. 인간은 자연법의 지배를 받는다. 이 법에 의하면 인간은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자연법을 어기는 것은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나 사자처럼 살해되어 마땅하다.


 물론 로크의 자연법의 지배를 받는 인간 공동체가 사회 계약론의 사회와 같은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로크 역시 사형은 사회의 바깥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사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나 사자'를 죽이는 것이다.


 김현경은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사형과 현대의 사형 방식에 대해 비교한다. 양자간의 차이는 전통적인 전쟁과 현대전의 차이와 비슷하다. 전통적인 사형은 사형수를 공개적으로 고문하고 모욕하는 의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의 사형은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겉보기 전통적인 사형이 더 잔인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형은 집행하는 과정에 사람을 물건으로 바꾸기 위한 의례적인 절차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잔인한 고문과 모욕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사형에서 사형수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사형을 언도받는 순간 물건이다. 사형을 고통 없이, 은밀하게 진행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아니라 '동물 복지'와 유사한 배려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시사점 7 : 사형의 잔혹성에 대해]
역사 속에서 사형을 받아 죽음으로써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그들로 인해 역사는 그 흐름이 바뀌기도 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사형에 처한 사람들 중 과거와 같은 영웅적인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사라졌다. 오늘날 사형수는 눈에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사라진다. 어떤 방법이 더 사형수를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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