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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 vs. 물질:테세우스의 배에 깃든 정체성의 비밀

by 정지영

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인간의 몸과 황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크레타섬에서 돌아올 때 타고 온 배가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배를 소중히 여겨 보존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낡은 부분들을 하나둘 새것으로 바꾸어갔지요. 그러다 마침내 배의 모든 부분이 새 것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여전히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 불렀답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만한 깊은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이 배는 과연 처음의 그 테세우스의 배일까요?"

이 물음은 단순히 배 한 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언가가 시간 속에서 조금씩 바뀌어갈 때,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물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물음인 것이지요.


이 물음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이어지면 더 주목하게 됩니다. 인간은 일정한 주기로 세포가 교체됩니다. 늘 동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몸도 테세우스의 배처럼 세포가 완전히 교체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포가 완전히 교체된 사람을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대상의 정체성은 어떻게 유지될까요? 철학에서는 이를 "대상의 동일성 조건"이라 부르며, 어떤 조건을 갖출 때 그 존재가 동일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 대표적인 철학자 두 사람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 동일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시간이 흘러도 대상이 같은 형상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이 그 형태(형상)에 있으며, 이 형태가 사물의 목적과 기능을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사물의 '형상'과 '질료'를 구분하면서, 사물이 동일성을 유지하는 핵심은 변하는 물질이 아닌 이어지는 형태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테세우스의 배가 같은 구조와 형태를 유지한다면, 일부 부품이 바뀌더라도 여전히 같은 배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의 목적인 항해 기능과 구조적 형태가 그대로라면, 이러한 형상이 배의 본질을 지켜준다고 본 것이지요. 즉, 사물을 이루는 물질이 바뀌어도 그 형태와 기능이 이어진다면 동일성은 잃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반면 존 로크는 "구성 동일성"이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대상을 이루는 물질이 그대로라면 그것이 바로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로크는 동일성의 기준을 물질이 얼마나 변하지 않고 이어지느냐에 두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사물의 동일성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물질이 얼마나 지속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로크는 동일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물질적 대상, 생명체, 그리고 인격의 동일성이 그것이지요. 그중에서 물질적 대상의 경우, 동일성은 물리적 구성 요소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데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테세우스의 배로 말하자면, 원래의 목재가 그대로 있어야만 같은 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부품이 새것으로 바뀌어 처음의 물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면, 로크의 눈으로 볼 때 이는 더 이상 같은 배라 할 수 없습니다. 물질이 바뀌면 사물의 정체성도 함께 바뀐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배의 부품이 하나씩 바뀌어 결국 모든 것이 새것으로 교체되었을 때, 이 배는 여전히 처음의 그 배일까요?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완벽한 답을 내리기 어려워 '테세우스의 배 역설'로 불립니다. 이 역설은 우리에게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정체성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줍니다.


현대에 와서 이 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던진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형이상학 분야의 대가인 피터 반 인와겐입니다. 그는 특히 사물이 어떻게 구성되고 그 정체성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매우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지요.


우리는 보통 여러 조각이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무 조각들이 모여 '책상'이 되고, 철과 플라스틱이 붙어 '자동차'가 되는 식이지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들여다보면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무 조각이 따로 놓여 있을 때는 '책상'이 아니다가 어느 순간 '책상'이 됩니다. 그런데 정확히 언제 '책상'이 되는 걸까요?


이는 마치 모래 한 알은 '더미'가 아니지만, 모래를 계속 쌓다 보면 어느 순간 '더미'가 되는 것과 비슷한 문제입니다. 철학자들은 이를 "구성의 역설" 또는 "모래더미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역설인 이유는, 개별 요소들이 모여 새로운 무언가가 될 때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모래더미를 예로 들면, 한 알씩 모래를 더할 때마다 갑자기 '더미'가 되는 시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모래더미가 그저 모래알을 쌓아놓은 것이라고만 하기도 어렵지요.


이런 맥락에서 반 인와겐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 부분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그리고 그는 놀라운 주장을 펼칩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실 거의 어떤 물질적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진정한 의미의 물질적 대상이며, 테세우스의 배 같은 것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반 인와겐은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생명체는 모든 세포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여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배는 그저 나무 조각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붙여놓은 것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배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진정한 의미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메레올로지적 니힐리즘' 또는 '부분 전체 부정론'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부분들이 모여 새로운 전체가 된다'는 생각 자체를 부정하는 철학적 입장이지요.


이제 정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볼까요? 먼저,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자체를 뿌리째 흔드는 물음을 던지고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속에서도 이어지는 '형상'으로 정체성을 설명했고, 로크는 물질이 얼마나 변하지 않고 이어지느냐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시각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이것이 저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피터 반 인와겐의 파격적인 주장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사물'이라는 개념마저 완전히 뒤집어놓습니다. 그는 생명체를 제외한 우리 주변의 물질적 대상들이 실은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테세우스의 배 같은 것들은 그저 부분들이 잠시 모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은 '모래더미 역설'이 보여주는 것처럼 '언제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는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으며, 우리가 평소에 당연히 여기던 생각들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습니다.


결국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정체성은 어디서 오며, 어떻게 이어지는 걸까요?"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어떤 기준을 적용해왔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철학은 물론, 과학과 예술,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이 문제는 계속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지요.


이처럼 테세우스의 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물의 정체성과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한층 더 넓혀주는 소중한 통찰을 선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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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교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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