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검열의 표현일까, 사람들은 본인의 영어실력이 부족하다고, 너무 어렵다고 으레 말한다. 조금 신기하긴 하다. 아마도 공교육 12년 동안 내내 배웠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취업을 위해 토익, 토익스피킹을 끊임없이 공부해왔는데도 영어를 못한다니.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코로나 때문에 계속 약속이 미뤄지다가 8개월만의 만남이었다. 그간의 근황을 서로 나누다, 어쩌다 또 대화 주제가 영어로 흘러갔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의 한 구석에는 영어라는 고민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친구에게 영어를 배워보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 하지만 친구는 배우고는 싶지만, 너무 바쁘기도 하고 영어가 어려워서 안 되지 않을까? 라며 허허 웃고 말았다.
한번은 또 다른 친구와 대화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가 말하길, 아무리 해도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는 이길 수 없단다.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하긴 하다. 하루 종일 영어로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아이가 어떻게 우리와 같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들만큼 영어를 많이 접해본다면 어떨까? 진짜로, 정말로, 안 되는 게임일까?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과연 외국에서 살다오지 않아서일까?
재밌는 건 몇 안 되는 브런치에 썼던 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조회수를 차지하는 건 영어와 관련된 글이다. 평소에는 50 - 100을 왔다갓다 하다가 영어공부 글을 쓰면 조회수가 10배, 20배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신기한 현상이다. 아마 남부럽지 않게 영어공부를 해왔는데, 여전히 영어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는 건 말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제대로 생각해 봐야 한다.
영어공부라는 고민이
왜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지.
우리는 정말 영어를 못 할까?
그동안의 영어공부방법이 잘못된 건 아닐까?
영어는 진짜 어려운 걸까? 그래서 못하는 걸까?
아니, 영어가 어렵다는 생각, 해도 안될거라는 생각 자체에 가로막힌 건 아닐까?
시작도 해보기 전에 겁먹은 채로 가능성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한계에 가둬버린 건 아닐까?
영어는 진짜 배우는 걸까?
최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어쩌면, 영어를 대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우리의 영어 공부를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며(예를 들면,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배워야하며, 사실 재미없는 방법이다.),
그 공부방법으로 몇 주 시도해봤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서 역시 영어는 어렵다고 체념한다.
그리고 결국 영어는 해도 안된다고 결론 지어버린 내 속의 그 고정관념 말이다.
영어공부에 대한 고정관념 깨기
영어는 진짜 어려운 걸까?
영어는 어렵다. 한글과 다른 문자 기호를 사용하고, 소리 체계, 어순, 심지어는 문화도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복잡한 문법도 많다(프랑스어나 독일어에 비하면 새발의 피긴 하지만). to 부정사, 수동태, 현재완료, 과거완료, 가정법 과거/과거완료, 현재분사 등등 모든 문법 규칙을 배우려면... 음, 글쎄. 문법의 모든 세부적인 규칙을 배울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보자.
한글과 영어가 너무 다른 언어라서 영어가 어려운 거라면, 영어권의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어는 절대 익힐 수 없어야만 하는 언어가 아닐까? 외국인들이 모두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비정상회담부터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는 외국인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걸 보면.
아니면, 우리가 영어를 어렵게 배운 건 아닐까?
영어를 어렵게 생각한 건 아닐까?
문법과 어휘공부, 진짜 그게 정답일까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영어 문법 교육을 싫어한다. 대체 왜 want, tell, ask 의 목적격보어에는 to부정사가 오고 make, have, let 사역동사는 동사원형을 취하는지를 외워야 하냐고 묻고 싶다. to 부정사의 세 가지 용법을 달달달 외우는게 읽고 말하고 쓰는데 대체 무슨 도움이 되냐고 묻고 싶다.
책이나 콘텐츠를 읽을 때는 정말 문제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굳이 writing에서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면, 문장을 쓸 때마다 동사에 want를 써놓고 목적어를 쓰고, 목적격보어를 쓰기 위해서 음, want, tell, ask의 목적격보어에는 to 부정사가 왔지, 그럼 to 부정사는 to 에 동사원형을 쓰니까 이렇게 쓰면 되겠군! 이렇게 글을 쓰는게 진짜 원하는 거냐고 묻고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어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아마 대부분 지루하고, 이해조차 잘 되지 않는 문법 공부가 먼저였을 것이다. 이처럼 영문법을 배우고 단어를 암기하는 공부를 '스킬 빌딩(skill building)'의 영어공부라고 말한다.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 스티븐 크라센은 언어를 공부하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의 영역으로 나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공부하는 '스킬 빌딩'이다. 크라센은 스킬 빌딩은 현존하는 가장 최악의 언어교육이라고 말한다. 아마 언어를 공부하는 학생들 중 95%는 스킬빌딩의 영어공부를 싫어하고 좋아하는나머지 5%는 스킬빌딩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일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근데, 진짜로, 영어는 배워야 하는 걸까?
영어로 그냥 읽어봅시다.
크라센은 "읽기는 영어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라고 말한다. 그냥 읽는 것이아니라, 정말 너무나도 재밌어서 이야기 자체에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것들을 읽는 거라고 말한다. 이 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는 타의적인, 수동적인 읽기가 아니다.
알고 싶고 궁금한 순수한 열정으로 읽어나가는 거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 멈출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는 거다. 다만, 그 이야기가 영어로 쓰여 있을 뿐이다. 그런 순수한 자발적인 읽기가 모든 언어습득의 가장 기초 원리라고 설명한다. 즉, 배우는 게 아니라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지는 거다.
이 'comprehensible input' 이라는 가설을 최근에야 발견했는데, 너무 신기했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던 15년 전부터 그가 주장한 대로 영어를 읽어왔기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 해리포터의 다음 편 이야기가 번역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 영어 원서를 펼친 게 첫 시작이었다. 첫 시작과 동시에 술술 읽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당시 내 영어실력에 비해 해리포터의 벽은 너무 높았다. 창피하지만 당시 책의 전체 내용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 50%가 넘었다.
꾸역꾸역 읽긴 했지만, 사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나름 학교에서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는데, 절반도 이해가 안 된다니. 이게 내 영어공부를 싹을 틔웠다. 이 소설의 내용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고, 더 잘 읽고 싶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원서로, 쓰인 그대로 읽고 느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미친듯이 읽어나갔다.
물론 이렇게 책을 읽는 와중에, 단어를 조금씩 외워보기도 했고, 혼자서 문장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 확실한 건 내 영어공부의 9할은 책읽기였다는 점이다. 재밌었던 건, 단 한 번도 회화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17살에 만났던 한 외국인이 내게 물었다. 혹시 영어권 국가에서 살다 왔느냐고. 아직 한국 밖을 다녀온 적도 없던 어린 나는 괜히 그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내가 배운 건, 결국 영어라는 언어를 배우는 건, 뭔가를 외우고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외우는 걸 워낙 싫어하는 성향 자체도 있었지만, 언어를 배우는건 그저 자주 만나고 내 몸과 마음에 조금씩 새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만나며
조금씩 내 안에 언어를 쌓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영어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진짜
해도 안 된다고?
영어와 오래, 함께 하려면, 일단 재밌어야 한다.
블로그나 유튜브를 보다보면 굉장히 자극적인 제목의 글들이 많다. '3개월 만에 귀 뚫기', '2개월 만에 토익 만점 만들기' '6개월만에 원어민과 대화하기' 얼마나 영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싶어하는지 사람들의 안달나있는 마음이 느껴진다.
굳이 시간을 세자면, 나는 영어공부를 15년째 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공부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아마 공부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여전히 영어를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냥 재밌는 이야기가 있으면 조금더 읽고, 조금 더 듣고,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가볍게 생각하고, 또 기회가 될 때마다 가볍게 접하는 게 내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이렇게 보면 영어는 악기랑 비슷하다. 피아니스트가 손이 굳지 않도록 매일매일 최소 2-3시간씩은 피아노를 치는 것 처럼 영어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영어가 사라지지 않도록 조금씩 접하는 것이다. 잠깐 공부해서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영어실력을 만들 수는 없다. 임계점을 돌파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고, 임계점을 돌파했다고 하더라도 잠깐 놓으면 사라지는 게 언어다.
영어라는 언어를 항상 가까이에 두고, 친해져야 한다. 영어를 어렵고 지치는 게 아니라, 재밌어서 가까이 두고 싶은 친구처럼 생각해보자. 그냥 좋아하는 미드를 보다가 저 표현은 어떻게 영어로 표현해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거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면 해외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고 블로그를 찾아보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sns를 찾아보고 인터뷰를 찾아봐도 좋다. 아니면 이미 번역본으로 읽은 책을 원문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결국 언어에는 자기 안에서 익숙해져 싹을 틔울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니 어쩌다 좋은 결과로 영어실력이 따라오는 것이지, 영어실력을 몇 개월 안에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덤벼서는 금새 지쳐 나가 떨어지고 말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