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간의 고생을 단 하루에 모든 걸 쏟아낸 딸에게 수고했다는 말 이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저녁으로 좋아하는 치킨을 시켜줬다.
치킨이 배달되기 전.. 방에서 답을 맞추던 딸은 국어시험 점수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예상대로 나왔는지... 뛰쳐나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치킨이 도착하고 식탁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렸는지 이런 말을 던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국어는 공부해도 성적이 잘 안 오르고.. 잘하는 애들은 무엇이 어떻게 나와도 잘한다는 것.
그러면서 5살 차이 나는 중1 동생에게 하는 말, "너... 대학 갈 생각 있으면... 책은 읽어야겠더라." 였다.
딸이 말한 stat은 선천적이라는 걸까? 아니다. 책 읽으라고 얘기한 걸 보면 말이다.
물론 언어 지능이 높은 사람이 국어나 영어 과목 시험에 유리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현 국어나 영어시험에서 타고난 재능과 높은 점수는 크게 관계가 없다. 비중으로 볼 때 문학/ 비문학 독해력이 가장 크므로 중요한 것은 읽기 분석력과 사고력이다. 즉, 어떤 지문이 나와도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찾아내고 이해하는 분석력과 사고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법과 작문, 문법은 어느 정도 공부하면 일정 수준으로 되지만, 독해력에서 점수 차이가 벌어진다.) 이러한 능력은 단숨에 생기지 않는다. 꾸준한 훈련을 통해 평소에 분석의 칼날을 잘 갈아 놓아야 어떠한 어려운 지문이 나오더라도 잘 자를 수 있다.
그럼 어떻게 분석력과 사고력을 높일 수 있을까?
책을 읽어야 한다. 특히 비문학 책을 읽고, 고전이면 더 좋다. 예전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삶과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고전이야말로 저자의 사고가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인정받은 이유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독서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직접 책을 읽어주고, 자녀가 한글을 깨치면 많은 책을 읽기를 바라며 책을 사준다. 시기마다 읽어야 할 책을 검색하고, 전집을 사며, 서점과 도서관에 데리고 간다. 집 책장에는 도서관 뺨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꽂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자녀가 본격적으로 학교 공부를 시작하면 학교 공부에 집중하고 책읽는 시간을 줄인다. 그나마 초등학교 때까지는 책을 읽지만 중학생이 되면 학과목 공부를 하느라책 읽을 시간이 없다. 책을 통해 길러야 할 세상의 이치, 리더십, 인성은 점점 먼 얘기가 된다.
그러나 분석력과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오히려 초등 고학년부터중요하다. 추상적 사고와 읽기 능력이 급격히 향상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더라도 흥미 위주의 책이나 만화책, 짧은 문장의 쉬운 책을 주로 읽는데, 이보다는 긴 문장, 저자의 사고 구조가 담겨있는 비문학 위주의 다소 어려운 책을 꼼꼼히 읽게 함으로써 분석력을 길러야 한다. 쉽지 않지만 이러한 책을 계속 접하다 보면 저자의 의도를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분석력과 사고력은 운동선수의 기초 체력처럼 조금씩 키워지는 근육과 같은 것이다.
그럼 왜 비문학인가?
어떤 책이든 읽는다는 것은 읽지 않는 것보다 좋다. 초등 저학년까지는 다양한 책을 '많이' 읽어어휘력을 기르고 읽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학년부터는 점차 문장 구조가 제대로 갖추어지고 논리적 흐름이 있는 (저자의 사고 구조를 따라가며 읽어야 하는) 비문학을 읽는 것이 좋다. 과학, 철학, 사회, 경제, 역사 등의 비문학책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논점(주장)과 그 논점이 나오게 되는 사고의 과정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호흡이 길다. 호흡이 길면 문장 하나 하나를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머리를 쓰며 읽는다는 것이다. 어휘력,개념어도 이러한 비문학을 통해 많이 길러질 수 있다.
이렇게 읽은 다음에는 줄거리나 내용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음미하고, 비판하며, 우리 사회 혹은 나의 삶에 적용할 것은 없는지 사고하면 좋다. 책을 읽다가 관심이 생긴 것이 있으면 꼬리를 물고 연관된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처음이 힘들지 계속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역사와 경제가 만나고, 철학과 과학이 만나며 문학과 만난다. 인류 지성사의 큰 틀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제 웬만한 책도 어렵게 않게 느끼게 되고 자신감이 생긴다. 대략 2~3년 정도면 책 읽는 기쁨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지대넓얕> 시리즈를 쓴 채사장님도 이러한 독서 습관을 통해 자신만의 지적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다시 딸 얘기로 돌아가서...
큰 애는 중학교때 2년 이상을 1주일 한번씩 책 읽고 분석하는 학원을 다녔다. (중학교 때는 고전이나 유명한 책을 청소년 수준에 맞게 쓰여진 책을 주로 했다) 책을 다 못 읽어도, 안 읽어도 좋으니 듣고만 와라 할 정도로 나는 이 수업을 통해 장기적으로 분석력과 사고력 향상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딸은 중고등학교때 국어학원을 다닌 적이 없다. 하지만 1주일에 한 번씩 책을 통해 저자의 사고 구조를 분석하고, 글을 쓰는 훈련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고 읽기와 쓰기의 기본기를 만들었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