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여행_9
… 여행 첫째 날: 야쿤 카야 토스트(Ya Kun Kaya Toast),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수영장 …
환상적인 만다린 오리엔탈의 전망에 한껏 취해 길을 나섰다.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이날 제대로 된 식사는 이른 아침 공항 라운지에서 든든하게 먹은 아침이 전부였다. 호텔 근처 마리나 스퀘어(Marina Square)에 그 유명한 야쿤 카야 토스트(Ya Kun Kaya Toast)가 있다고 해서 들렀다 가기로 했다. 호기롭게 호텔을 나섰는데 마리나 스퀘어 입구를 찾는 것부터 일이었다. 최대한 짧은 지름길로 가고 싶었지만 방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뒷구멍 같은 계단을 올라가기까지 했는데 결국 멀어 보였던 정석대로 가니 번듯한 입구를 찾았다.
다행히 그 넓은 건물에서 야쿤 카야 토스트는 빨리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 한 바퀴를 쭉 돌고 ‘왜 없지?’ 싶어 뒤를 딱 돌아보니 가게가 있었다. 토스트의 맛은 그저 그랬다. 빵은 바삭했지만 안에 든 카야 잼과 버터, 수란의 맛이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이삭 토스트처럼 풍성한 재료를 한입 베어 먹는 데 익숙해서인지 ‘싱가포르에서는 이런 걸 먹는구나.’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카야 잼에 대한 기대가 커도 너무 컸나 보다. 여행 내내 경쟁사인 토스트 박스(Toast Box)에서도 한 번 먹어보고 비교해보려고 했는데 끝내 가지는 못했다. 커피 한 잔과 토스트로 낯선 땅에서의 긴장을 잠시 풀고 다시 길을 나섰다.
싱가포르를 여행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였다. 슈퍼트리 그로브(Supertree Grove)의 반짝이는 불빛들, 그 불빛들을 가로지르는 공중정원 OCBC 스카이웨이(OCBC Skyway)는 마리나 베이 샌즈, 머라이언 상(Merlion Statue) 보다 강렬히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숙소인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마리나 베이 샌즈, 그리고 가든스 바이 더 베이와는 헬릭스 브리지(Helix Bridge)라고 불리는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기에 부담 없이 걸어가기도 좋았다. 고백하건대 여행 첫날 호텔에 짐을 풀고 길을 나섰을 때는 베이프런트 브리지(Bayfront Bridge)로 길을 건너갔었다. 이 다리는 차도와 보도가 함께 있으며 마리나 베이 샌즈가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사가 있다. 헬릭스 브리지의 존재를 안 뒤 이때 한참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경사 덕분에(?) 마리나 베이 샌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여행의 설렘도 배가 됐던 것 같다.
가든스 바이더 베이로 가기 전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을 들를 수밖에 없었다. 워낙 유명한 호텔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가는 길을 못 찾은 탓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와서 곧장 왼쪽 편으로 내려가 싱가포르 플라이어(Singapore Flyer)를 왼편에 두고 가면 된다. 혹시나 에어컨 바람을 쐬며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싶은 행운까지 바라며 호텔로 들어갔다. 거대한 화분들, 기울어진 채 버티고 서 있는 건물에 감탄하던 찰나, 정신을 차려보니 요행은 없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가고자 다시 습한 밖으로 나섰다. 건물 외부에 고대하던 목적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2012년 문을 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길게 늘어선 사람들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진 않지만 각종 희귀한 식물들이 살고 있는 식물원이자 산책하기에 좋은 공원이기도 하다. 물론 슈퍼트리 그로브 덕분에(?) 보태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보다는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사실이다. 똑같은 관광지이지만 보태닉 가든은 편하게 거닐 수 있는 동네 공원 같다면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놀이동산 같은 느낌이랄까.(@Gardens by the Bay 홈페이지)
나는 ‘마이 리얼 트립(My real trip)’이라는 사이트에서 한국에서 플라워 돔(Flower Dome)과 클라우드 포레스트(Cloud Forest) 표를 미리 구입했다. 현장에서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지 않아도 되고 종이 출력 없이 QR코드로 간편하게 입장할 수 있으며 가격까지 저렴하다. 게다가 유효 기간 안에만 사용하면 돼 유연하게 일정을 정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제격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구매를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덥고 습한데 플라워 돔과 클라우드 포레스트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 한 줄기가 낙이었다.’는 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싱가포르의 습기를 상상만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은근히 올라오는 습기에 맥을 추지 못했다.
OCBC 스카이웨이 입장권도 미리 구입할 수 있는데 싱가포르 출발 전 관람 여부를 확정하지 못해 구입을 보류했었다. 현장에 도착해 관람을 결정했고 7시 20분에 입장하는 표를 구했다. 이곳은 슈퍼트리들을 22미터 높이의 공중다리로 이어 놓은 구조 때문에 시간대별로 입장하는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7시 20분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 표지판을 보고 클라우드 포레스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은근히 멀게 느껴졌는데 막상 근처에 도착하니 어마어마하게 긴 줄에 더 놀랐다. 다행히 생각보다 입장은 빨랐다. 입구에 들어가면 곧바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실내 인공 폭포를 볼 수 있다. ‘와!’라는 탄성과 함께 돔 천장을 바라보면 관람로가 폭포를 둘러싸고 꼬불꼬불 높게도 있고, 다시 시선을 내려 주위를 둘러보면 그 관람로를 완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7시 20분 OCBC 스카이웨이 입장’이라는 시간에 쫓겼고 결국 관람을 포기하고 나가자는, 나의 여행 역사(?)를 통틀어 가장 냉정한 결정을 했다.
잘한 결정이라고 합리화를 하며 바삐 걸어 OCBC 스카이웨이에 도착했다. 7시 20분 입장이었지만 약 10분 정도 지연됐다. 어둑해진 하늘, 7시 45분부터 시작되는 가든 랩소디(Garden Rhapsody)를 예고하며 발그레 켜진 불빛들, 그 불빛들이 켜지자 22미터 아래에서 일어난 사람들의 환호성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안전 요원들은 앞선 관람도 지체된 탓인지 관람객들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길 재촉했다. 독특한 풍경을 사진으로 많이 담고 싶었는데 불빛들이 다 켜지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예쁘진 않았다. 여행 둘째 날 후기에 자세히 담겠지만 슈퍼트리들의 환상적인 가든 랩소디는 바닥에 주저앉아 보는 게 최고다.
음악에 맞춰 슈퍼트리들의 화려한 불빛 쇼가 펼쳐지는 가든 랩소디는 매일 밤 7시 45분, 8시 45분에 펼쳐진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가든 랩소디는 내일 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 화려한 쇼를 뒤로한 채 플라워 돔을 보기로 한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지만 이 쇼를 보기 위해서는 서둘러 자리를 잡는 게 좋다. 아니나 다를까 지상에 내려왔을 땐 쇼가 시작되기 직전이었고, 사람들은 바닥에 발 디딜 틈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서기도, 자리를 비집고 앉기도 힘들었다.
나는 또 한 번 잘한 결정이라고 다독이며 플라워 돔으로 갔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해가 진 뒤 찾은 플라워 돔은 너무 깜깜했다. 투명한 유리 돔이었기 때문에 깜깜한 밤의 어둠이 고스란히 들어왔고, 중간중간 조명이 켜져 있었지만 꽃과 장식물들의 본래 색깔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다음 날 가든 랩소디를 보러 또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찾아야 해서 꼭 이 날 밤 무리해서 보지 않아도 됐었던 상황. 아마도 난 ‘뭐라도 제대로 보자.’라는 생각이 매우 강했었던 것 같다. 클라우드 포레스트는 입구만 보고 나왔고, OCBC 스카이웨이도 어슴푸레할 때 봤으며, 가든 랩소디도 다음 날로 과감히 제쳤다. 그래서 플라워 돔만큼은 제대로 보고 마침표를 찍고 싶었나 보다. 괜히 간만 보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린 일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엄청나게 꼬이진 않았지만 타이밍이 완벽하지 않았던 상황은 ‘밤 9시 호텔 수영장에서 마리나 베이 샌즈의 레이저 쇼 스펙트라(Spectra) 보기’라는 또 하나의 계획에도 영향을 줬다. 플라워 돔을 아쉬움 속에 나와 부랴부랴 호텔로 가서 수영장을 찾았건만 도대체 탈의실이 어디 있는지 찾지를 못했다. 겨우 직원을 찾아 물었건만 딱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탈의실은 이미 누군가가 쓰고 있었다. 결국 9시는 훌쩍 지나버렸고 수영장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여행은 헤매는 맛, 일정이 바뀌는 맛을 즐기며 여유롭게 돌아봐야 했건만. 예상보다 지연된 호텔 도착 시간, 관람에 걸리는 시간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무리하게 욕심을 냈던 첫날이었다. 나는 여행 첫날 클라우드 포레스트, 플라워 돔, 시간적 여유가 되면 OCBC 스카이웨이, 그리고 가든 랩소디까지 모두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항에서 예상보다 늦게 출발해 6시쯤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 도착한 데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분으로부터 나의 여행 기간이 공휴일과 겹쳐 사람들로 매우 붐빌 것이라는 조언까지 들었는데 그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참고로 8월 11일 일요일은 하리 라야 하지(Hari Raya Haji)라는 이슬람 기념일이었다.(@Visit Singapore 홈페이지)
순간 4월에 다녀온 패키지여행이 머리에 스쳤다. 빠듯한 일정 탓에 인증 사진 찍을 곳만 후다닥 찾아다녔더랬지. ‘이 거리를 버스 안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서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더랬지. 하지만 이번엔 자유 여행이었다. 자유롭게 더 머물 수 있었고, 자유롭게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영 자유롭지 못했나 보다. 돌아보면 첫 자유 여행이었던 삿포로에서도 모든 걸 다 보고 담고 싶었고, 급기야 밤 10시에 밥을 해결하는 사태가 빈번했었다.
결론적으로는 다 보긴 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아쉬움을 곱씹으며 다음 날은 조금 더 나은 여행을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첫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