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_7 영화 『라라랜드』
*글 속에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미언 샤젤(Damien Chazelle, 1985~)의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2016). 평단과 관객을 모두 사로잡은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도 화려하게 빛났다.
그런데 나는 2016년부터 『라라랜드』에 빚을 지고 있었다. 서울 모처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봤었는데, 아니 보려고 노력했는데 그야말로 꿀잠을 자고 말았다. 지금도 어디 가서 “『라라랜드』 보다가 잤다.”라고 하면 다들 너무하다고 한 마디씩 하는데, 이 자리를 빌려 변명도 하고 묵은 빚도 갚으려고 한다. 당시 점심을 먹은 후 즉흥적으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관 의자에 거의 눕듯이 앉았었다. 영화 상영 시간이 임박했을 시점에 남아 있던 맨 앞자리를 예매했던 것인데, 정말 잠이 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렇게 나에겐 꽤 오랫동안 ‘보면서 푹 잤던 영화’였던 『라라랜드』를, 최근에 명작들을 챙겨보기 시작하면서 다시 보게 됐다.
꽉 막힌 도로, 흥겨운 리듬으로 시작하는 ‘Another Day of Sun’이 흘러나온다. ‘Mia & Sebastian’s Theme’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가 처음 만났던 식당에서 등장한 뒤 두 사람이 서로를 떠올릴 때마다 계속해서 연주된 반면, ‘Another Day of Sun’은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강렬하게 등장하고 사라진다. 여러모로 영화의 특징을 요약한 곡인데 흥겨운 재즈 리듬, 다채로운 색깔, 뮤지컬 형식, 꿈을 좇는 가사의 내용이 그렇다.
뭐든 시작과 끝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영화는 시작만큼이나 끝도 참 좋다. 만약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날 세바스찬이 미아를 쌀쌀맞게 지나치지 않고 키스를 했더라면, 만약 세바스찬이 재즈 카페에서 만난 동창 키이스(존 레전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밴드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미아의 일인극이 열리던 날 가득 채워진 관객석에 세바스찬이 있었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세바스찬과 미아 둘 사이에 예쁜 아이까지 있었을까.
상처로 남은 일인극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미아, ‘집 앞에 도서관이 있다.’는 단서 하나로 캐스팅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 세바스찬. 오디션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찾은 그리피스 공원에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린 어디쯤 있는 거지?”라는 미아의 말에 세바스찬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 보자.”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틀 뒤 세바스찬의 좋은 직감대로 미아는 오디션에 합격을 했을 것이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세바스찬 또한 재즈 클럽을 차리고 전통 재즈를 우직하게 지켰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간은 5년간 나란히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그리피스 천문대(Griffith Observatory)는 세바스찬과 미아를 이어줬던 공간이었다. 미아가 10대들의 반항을 다룬 막장 TV 드라마 1차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두 사람은 ‘연구 목적’으로 리알토 극장에서 상영 중인 『이유 없는 반항』을 보기로 한다. 영화를 보기로 한 날, 미아는 오디션 관계자들의 냉대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리알토 극장을 보자 언제 화가 났냐는 듯 미소를 짓는다. 즐겁게 외출 준비를 하는데 한 달 남짓 만난 남자 친구 그렉(핀 위트록)이 찾아온다. 어쩔 수 없이 그렉을 따라 잊었던 선약 자리에 간 미아는 마치 그녀를 부르는 듯한 세바스찬과의 테마곡을 듣고 그에게로 향한다. 뒤늦게 영화관으로 뛰어 들어와 세바스찬의 옆자리에 앉은 미아, 두 사람은 영화를 보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필름이 타며 영화는 갑자기 중단되고 마는데! 보고 있는 영화는 끝났지만, 미아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그들만의 영화를 찍는다. “A technicolor world made out of music and machine. It called me to be on that screen and live inside each scene.”이라는 ‘Another Day of Sun’의 가사처럼 말이다. 그리피스 천문대는 영화와 현실을 이어준 곳, 두 사람이 사랑을 키운 곳, 그리고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나 미래를 이야기했던 곳이었다.
영화의 결말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결실로 맺어지지 못했다는 슬픔에 조금 더 무게를 뒀다. 자신의 재즈클럽을 찾은 미아를 발견하고는 담담하게 “Welcome to Seb’s.”라고 말하며 피아노 앞에 앉은 세바스찬. 그의 연주에는 꿈같았던 사랑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다. 전통 재즈에 대한, 연기에 대한 열정을 줄기차게 보여줬던 두 사람이 결국엔 꿈을 이뤘지만 참… 쌉싸름하다.
데미언 샤젤 감독의 영화 『위플래쉬(Whiplash)』(2014)를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영화는 그저 큰 줄거리를 따라가며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관을 가득 메운 드럼 소리가 탁 켜지는 조명과 함께 멈췄을 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꼈다.’ 나 역시 치열하게 나 자신을 이기고자 했었고, 플래처(J.K. 시몬스) 선생님만큼은 아니었지만 채찍질해주던 선생님들도 계셨던 지라 앤드류(마일스 텔러)의 광기에 묘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라라랜드』를 떠올리면 노을 질 때의 농익은 푸른 하늘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사랑하는 하늘이다. ‘이렇게 하루가 또 가는구나. 곧 어두워지겠구나.’라는 하루 반성을 하는 것도 잠시, 자연이 뿜어내는 빛깔에 그저 감탄 또 감탄할 뿐이다. 이제 그 짙푸른, 달콤쌉싸래한 하늘을 보면 영화 『라라랜드』도 함께 떠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