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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ya Dec 22. 2020

은사님이 선물해주신 ‘내가 만날 세계’

다시보기_8 책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코로나로 지쳐갈 무렵,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번 생일을 앞두고 희한하게 긴장(?)이 됐다. ‘생일이라고 특별히 축하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삐딱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문이 샘솟다 보니 얼른 생일이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대학교 은사님으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5년이나 묵은 제자에게 손수 연락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 ‘스승의 날’처럼 핑계 대기 딱 좋은 날들이 있었음에도 종종 연락드리지 못한 죄송함이 교차했다. 생일 덕분에 은사님과 온기 가득한 근황을 이어가던 중, 은사님은 나에게 보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며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나는 책 선물은 또 하나의 세계를 선물 받는 느낌이라 늘 반갑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정성스러운 은사님의 손글씨가 적힌 노란 봉투를 뜯으니 귀여운 생일 축하 카드와 함께 파란색 표지의 책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석지영 지음, 송연수 옮김, ㈜북하우스 퍼블리셔스, 2013)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꽤 오랫동안 책꽂이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선물 받은 책을 당장 펴보지 않은 이유는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인 석지영 교수는 이미 대학 시절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2011년 tvN 방송)라는 프로그램에서 알게 된 인물이었다. 2011년의 나는 반수에 실패해 어쩔 수 없이 다시 학교에 복학을 했었고, 내면의 실망감과 동기들과의 괜한 어색함을 감춘 채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보자고 굳게 마음을 다잡던 때였다. 분야를 막론하고 소위 말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들을 보며 힘을 얻곤 했었는데, 그때 찾아봤던 분들 중에 석지영 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졸업하고 당장 어떤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할지 몰라서, 어떤 문이 열리는 문인지 몰라서 여기저기 문을 두들기느라 바빴던 때도 분명 있었다. 합격만 한다면 어디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만 잘 지나가길 바라고, 일과 사람에도 분명한 호불호가 생겨버린 5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을 다니며 석사 과정을 밟고 싶다는 욕심은 있지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석·박사 과정을 밟으며 연구에 몰두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냉정하게 요약하자면 나와는 이제 크게 관련이 없는 분야에 있는 인물의 수필인지라 당장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로부터 3개월 하고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이 책을 펼쳤다. 나를 괴롭히던 갈등과 번민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책이라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결정에 확신을 줄 수 있는 뭔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나에게 고민을 던져준 날은 내 생일로부터 정확히 3개월 뒤인 12월 2일이었다. 한창 일하고 있던 오전,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자산관리 교육을 이수해보지 않겠냐는 전화였다. 나는 “지원자가 없는가 봐요.”라는 퉁명스러운 답을 툭 내뱉었다. 내가 그 분야에서 눈에 띄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향후 자산관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실무 경력을 쌓겠다고 누누이 다짐했었던 지라 분명한 거절 의사를 전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일을 하는데 전화 내용이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좋은 기회를 너무 쉽게 뻥 차 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갑자기 심각해졌다.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찬 말투로 도도하게 튕긴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확실한 답을 언제까지 주면 되는지 양해를 구했고, 오후 2시까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얼른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해야 했다. 딱 한 분의 선배가 떠올랐다. 선배는 무조건 교육을 신청하라고 말씀하셨다. 경험과 연륜, 나에 대한 애정까지 녹아든 선배의 말을 듣고, 결국 교육 이수를 결심했다. 교육 신청을 위해서는 A4 한 장 분량의 지원서를 쓰고 책임자 분의 결재를 맡아야 했다. 만에 하나 그 책임자 분이 외부 일정 등으로 자리를 비우면 결재를 못 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짜고짜 5시에 결재를 맡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통보 아닌 통보를 하고 나니 일단 마음이 편해졌다. 급한 일만 대충 정리하니 4시 30분이었다. 일방적으로 약속한 5시까지 부랴부랴 지원서를 휘갈겼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자기소개서를 쓰며 자연스럽게 쌓인 작문 실력을 이때 다 발휘한 것 같다.


  그렇게 나는 25년 남짓 남은 내 회사 생활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교육 이수 결정을 뚝딱,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했다. 교육 이수 후에는 해당 분야에서 근무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렇게 경력이 한두 해 쌓이기 시작하면 결국 그 분야에 눌러앉는 게 순리다. 무언가에 홀린 듯 결정을 내린 12월 2일이 지나니 엄청난 고민이 밀려왔다. 고민을 해소하고자 몇몇 분들에게 추가로 조언을 구했는데 평소 준비했던 분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셨다. 다시 또 심각해졌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교육 신청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해야 하나 싶었다. 차라리 전화를 받지 말 걸,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오늘은 이 마음, 다음 날은 저 마음인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내 마음이 확실하지 않으니 계속 이런저런 말들에 휘둘리고 있었다. 나의 방황은 생각보다 빨리 종결됐다. 교육 신청 합격자 발표일이 예정보다 당겨졌고, 내 이름 석 자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무미건조한 이름 옆에 ‘엄청난 고민을 했음’이라고 한 마디 적어주고 싶었다.


  합격자 발표 다음 날은 휴가였다. 사무실 근처 집에 콕 틀어 박혀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를 통해 석지영 교수를 만났다. (특유의 영어 번역투로 인해 읽기 어색한 부분이 종종 있었다.) 만 6살 때 미국으로 갔고, 영어를 하지 못해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던 초등학교 1학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니 언어는 해결됐지만 이번엔 소극적인 성격이 학교생활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 그녀에게 돌파구가 된 것은 책이었다. 무수한 책들을 읽으며 심리적 안정을 느낀 것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피아노, 바이올린, 발레를 배웠다. 특히 발레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다. 선망하던 아메리칸 발레학교(School of Aerican Ballet; SAB)에서 교육 수료 후 다음 단계로 승급할 몇 안 되는 학생이 됐지만, 9학년이 되면 본래 다녔던 영재학교인 헌터스쿨에서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어머니와의 조건부 약속으로 어쩔 수없이 그만뒀다. 발레를 그만두고 큰 상실감에 빠져 방황하던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로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기도 했다. 학업 성적이 빼어난 건 아니었지만 발레와 피아노를 통해 스스로를 단련했고, 학생의 잠재력과 다양성을 보는 미국 대학 입시제도 덕분에 예일대에 합격했다. 대학 합격 후 전에 없던 자유를 누리다가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의 시에 대한 소논문 작성을 계기로 문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예일대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을 연구했다. 특히 박사학위 논문은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와 출판 계약까지 맺는 성과도 거뒀지만, 문학 연구는 본인과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보다 실용적인 학문을 갈망하며 하버드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하버드 로스쿨 종신교수’라는 길까지 이어지게 된다.


  “책 읽기는 나의 포근한 피난처가 되었다. 책에 나오는 다른 이들의 생각과 느낌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그들이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내가 처음으로 그렇게 느낀 사람도 아니며 그렇게 느낀 마지막 사람도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나와 같은 현실의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책을 통해서 나처럼 홀로 여행을 하는 아이들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p.57)라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이제 막 깜깜한 고민의 터널을 뚫고 나와 새로운 길을 향한 출발선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보니 ‘법’이라는 분야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겪었던 선택의 순간들과 어려움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벗어나는 과정에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녀에겐 끈기가 있었고, 그녀를 발견해 준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책 읽기, 발레, 피아노, 그리고 연구는 끈기와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하라고 조언해줬고, 시험 점수와 무관하게 연구자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해준 선생님들이 있었다.


  책을 읽으니 나의 학창 시절 생각이 참 많이 났다. 특히 대학 시절, 지금 생각해도 매우 큰 용기를 냈던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토론식으로 진행된 저널리즘 전공 수업을 수강하기로 결정한 것, 그리고 인문 아카데미를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첫 토론 수업 때는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야말로 아무 말을 했고, 토론 후 교수님의 “말 안 해도 알지?”라는 짧고 굵은 평가에 “네.”라고 답하며 쓴웃음을 지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날 이후로 토론 수업이 편해졌고, 마지막 토론 때는 토크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 또한 ‘자신들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 이번 학기 가장 인상적인 토론’이라는 평가를 해주셔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인문 아카데미는 바로 직전 그 과정을 이수한 친구의 추천으로 시작하게 됐는데, 맛보기 수업 때 날고 기는 동기들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 있으니 위축돼 그만둘까 싶기도 했다. 일단 합격을 했으니 좀 해보다가 그만두자고 생각했는데 그 프로그램 덕분에 내 직업과 밀접한 경제 뉴스도 읽게 됐고, 책도 읽게 됐다. 특히 철학과 교수님의 수업에 애정이 많았다. 첫 발표 때는 책을 오독하고 엉뚱한 내용으로 발표를 했었다. 친절한 교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따로 설명을 해주셨는데 워낙 바탕이 없었을 때라 정확히 뭐가 틀렸는지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누가 이 개념들을 도식화했니? 내가 그린 거랑 같네.”라는 칭찬을 교수님께 들었을 때, 감히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좋아했었더랬지. 참, 1년 동안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사람으로 동료들이 나를 첫손가락에 꼽아준 것도 참 감동이었다. 나를 언급할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무(無)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려고 부단히 애썼던 걸 동료들이 알아준 것 같아 고마웠다.


  그렇다. 책으로 사람 여행을 떠나 보니 과거의 내가 보였다. 과거의 나도 그녀처럼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고, 끈기와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때의 깨달음과 즐거움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성장과 성공이었기에, 그 이면에 숨겨진 고민과 성장통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향후 회사에서의 경력과 관련된 나의 선택이 결코 완전히 가벼워 보이진 않는다. 과거 나의 경험들은 지금처럼 생계와 직결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언제든 부담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또한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100% 보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끈기와 지혜로운 선생님들이 있기에, 용기 내봤던 경험이 있기에, 다시금 용기를 내보고자 한다. 은사님이 주신 선물 덕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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