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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의학신문 Aug 30. 2018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 - ②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첫 번째 연재에서 ‘전기밥솥에다가 에너지를 쓰면서 살지 말자(할 수 없는 것은 원하지 말자!)’라고 끝맺음을 하였었습니다.
이 원칙을 스스로의 삶에 적용을 해본다면 생각보다 많이 깜짝 놀라실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곳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고?


이것만 인식을 하셔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훨씬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출근길 지하철에서, 퇴근길 양재 IC 인근에서 에너지를 쓰고 있을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험을 보고 나서, 합격 발표를 앞두고는 더 이상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더 이상 전기밥솥 앞에서 용을 쓰는 그런 어이없는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번아웃 시키지 말자고요.

첫 번째 연재 말미에 제가 이 원칙은 우리의 대인관계에 더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원칙이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먼저 관계가 전혀 없을 거 같지만, 상당한 연관성이 있는 영상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자 합니다.
그 영상은 김제동 씨가 ‘연애’에 관련해서 강의한 영상입니다.
유튜브에 ‘김제동 연애’라고 검색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영상에서 김제동 씨는, 연애는 무척 간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연애는 ‘민주주의 원칙’에만 입각해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내가 나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 듯이, 타인에게도 타인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강조합니다.
김제동 씨는 연애도 이 원칙만 적용을 한다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재미있게 주장을 합니다.
정말 재미있는 영상이니 유튜브에 검색을 하셔서 직접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원칙만 적용을 한다면,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이성이 보이면 그냥 말을 걸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식사 한 번 하실까요?’라고 그냥 툭 던지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그분이 ‘싫어요’라고 말하시면 그냥 가던 길 가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고백을 했는데, 어떻게 내 고백을 거절해?’라고 생각을 한다면,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아주 독재적인 발상입니다.
고백을 하느냐 마느냐는 나의 권리이듯이, 고백을 받고 거절하느냐 마느냐는 그(그녀)의 권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고 ‘왜 내 고백을 거절해? 내 고백을 거절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백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면 고민은 내 것이지만, 고백을 하고 나면 고민은 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것이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고백은 주로 중간고사 기간에 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재미있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과장되어 있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장 속에 우리 삶에 큰 교훈을 줄 수 있는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김제동 씨도 강의 말미에 이 원칙은 우리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대원칙이라고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답을 듣기 전에 답을 찾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고, 스트레스가 큰 사건입니다.
그런데 김제동 씨 영상을 보면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쉬워 보입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 나는 이성에게 고백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데, 김제동 씨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할까요?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가 질문입니다.
한 번 답해 보시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수동적으로 글을 읽는 것과 능동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스스로 가져가는 것에 있어 큰 차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위 기술에 답도 어느 정도 적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빈 공간에 자신의 생각을 넣어보시길 바랍니다.



생각을 좀 해보셨나요?

네, 맞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고백을 할 때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을 강요합니다.
‘내 고백을 거절하면 안 되는데’, ‘내 고백을 거절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은 모두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생각들입니다.
김제동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재적인 발상입니다.
고백을 할지 말지가 나의 권리이듯이, 고백을 받을지 말지는 상대방의 권리입니다.
게다가 ‘상대방이 고백을 받느냐 마느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어 자체가 ‘나’가 아니지 않습니까?

첫 번째 연재의 결론이 생각이 나시나요?
맞습니다. 우리는 대인관계에 있어, 주어가 ‘나’가 아닌 많은 바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가 ‘나’가 아니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의미합니다.
대인관계가 어려운 연유는 대부분 여기서 기인합니다.
애초에 할 수 없는 것을 바라왔던 것입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힘드신가요? 무엇을 바라고 계신가요?
‘엄마가 잔소리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자식과의 관계에서 힘드신가요? 무엇을 바라고 계신가요?
‘아들(딸)이 공부 좀 했으면 좋겠는데...’

친구와의 관계에서 힘드신가요?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보다 나를 더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성관계에서 힘이 드신가요?
‘내 남자(여자) 친구가 이렇게 행동해줬으면 좋겠는데...’

이 무수한 바람들의 공통점이 보이시나요?
이 바람들 중에 주어가 ‘나’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주어가 상대방(타인)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신 건가요?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버튼만 누르면 작동이 되는 로봇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 행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한 대인관계가 편해질 수 없습니다.
전기밥솥 앞에서 용쓰고 ‘피가 말린다’라고 되뇌는 것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를 쓰면서 지칠 뿐이지, 바뀌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크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요.
물론 이 문장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연재 내용을 벗어나는 내용이라 생각하기에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연재 중반부에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여기까지 강의를 하고 나면 이렇게 반응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에서 모든 바람들을 포기하고 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살 거면 굳이 사람들 사이에서 살 이유가 없겠지요. 그냥 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면 됩니다.
그런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고자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이 가장 가장,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첫 번째 연재에서 제가 ‘첫 번째 이유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인지 할 수 없는 일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정신 건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제게 물어보신다면, 저는 ‘인식하기’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식을 하고 나면 놀라운 것들이 발견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바라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요.

여기까지가 첫 단계입니다.
이 첫 단계는 강조, 또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첫 단계에서 끝내면, 대인관계에서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허무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주장을 하고 싶지도 않고, 또 실제로도 제 주장이 거기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그다음 단계에 대한 이야기도 가지고 있지만, 지면 관계 상 그 이야기는 다음 연재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힌트를 조금만 드리자면, ‘인식을 했다면, 해상도를 높여서 바라보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시겠지요?
다음 연재에서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번 연재에서는 생각해보면 좋음직한 질문 하나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법륜 스님 영상에서 보았던 질문이고, 제 강의 내용과 많은 것이 맞닿아 있는 질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좋은 질문이니 이 기회에 잘 생각해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며칠 뒤 건강검진 결과가 나와서 진료를 보러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위암’이니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내 일’이라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기분이 우울하고 침울해지시나요?
정말 위암을 통보받은 이 날이 우울해하고 침울해해야 하는 날일까요?
오히려 감사해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여러분은 이 일이 ‘우울, 슬픔’으로 다가오시나요? ‘기쁨, 감사’로 다가오시나요?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이 질문이 제 강의 내용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도 다음 연재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커밍 순~


※ 본 연재는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강의 내용을 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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