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국문학세상 봄여름호 기고작
2019년 여름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캐나다에 다시 돌아온 후 1년도 되지 않아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되었다. 해마다 꼭 한 번씩은 고국에 방문해서 가족들을 만났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3년 동안은 한국에 방문할 수 없었다. 지난해 첫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올해 초 결혼 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올여름까지 육아휴직 중인 아내가 아이와 함께 3개월간 시댁에서 우리 부모님과 함께 지내기로 하고, 나는 처음 2주와 돌아오는 2주 동안 한국에서 함께 있기로 하였다. 2 달이라는 시간 동안 시댁에서 나 없이 아이와 함께 있어 주기로 한 아내에게 너무 감사하다.
한국에 장기간 방문하기로 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아버지의 건강 때문이다. 당뇨로 30년 가까이 고생하신 아버지께서 작년에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생하신 후부터 신장의 기능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해서 곧 투석을 받아야 한다고 진단받으셨다. 투석을 시작하면 우리가 사는 캐나다 밴쿠버에 방문하시는 것이 많이 어려워지시기 때문에 손주와 오랜 시간을 보내실 기회를 만들어드리기 위해서다.
손주와 며느리가 와서 오랫동안 있을 것이라는 소식에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오는 시기에 맞춰 부랴부랴 전원주택을 지어 이사하셨다. 아파트에서 25년을 살아오셨는데 햇볕이 잘 들고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 동네에 손녀가 뛰어다닐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주택을 지으셨다.
20년 전 홀로 이민 가방 2개를 들고 타고 태평양을 건넌 후, 50번도 넘게 이 바다를 건너다니다가 혼자가 아닌 딸과 아내의 손을 잡고 탄 비행기 안에서 나는 많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난여름 아버지께서 건강이 악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역이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이곳에 가족과 친구가 모두 있는 아내는 역이민을 선뜻 찬성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는 한국에 가서 같은 일을 할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도 아이 교육 환경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다. 내가 뚜렷한 대책을 마련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역이민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하고 이자율이 올라가면서 경기가 많이 어려워졌다. 나는 미국에 본사를 둔 유통기업의 캐나다 지사에서 구매담당자로 근무 중이다. 경기가 어려워지니 직장에서 오는 매출에 대한 압박과 업무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외국 회사는 일과 삶의 균형이 지켜질 것이라는 환상과는 다르게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업무에 매달려야 했다.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있던 어느 날 근무 도중 갑자기 찾아온 현기증과 함께 잠깐 정신을 잃게 되었다. 다시 몸을 제대로 가누고 의자에 앉으려 했지만, 구역질과 함께 어지럼증이 찾아와 잠시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내 건강에 대한 불안감이 찾아오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실리콘밸리를 시작으로 북미기업들의 구조조정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유명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살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나의 거래처들도 이 구조조정을 피하지 못했고 매주 들려오는 뉴스에 총성 없는 전쟁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 회사에서도 몇몇 동료들이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했다.
누구도 승리하지 않은 전쟁터에서 운 좋게 총알을 잘 피해 살아남은 기분이었다. 살아남은 자들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이렇게 지쳐버린 내 모습을 보고 있는 아내 또한 많이 힘들어했다.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 돌이 채 되지 않은 딸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울음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좋은 아빠도 남편도 아들도 되지 못한 채 스스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출구를 찾아 헤맸지만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위로는 곧 고국에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 몰래 한국에 있는 기업들의 채용정보를 알아보았다. 먼저 한국에 들어간 선후배들과도 연락하기 시작했다. 왠지 한국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부푼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주 동안 지내면서 한국에 먼저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선후배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국살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모습과는 다르게 그들도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삶의 무게는 여전히 존재했다.
직장인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지하철 9호선을 탈 일이 생겼는데, 작년 가을 이태원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의 경험이 무색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뒤엉키고 포개져 매번 다음 역에 정차할 때마다 밀리고 밀리는 경험을 해야 했다.
지방에서 유통업을 크게 하는 친구가 내가 왔다는 소식에 식구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함께 유학하다가 군 제대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물려받았는데, 15년 동안 회사를 크게 성장시켰다. 지방이지만 아파트도 여러 채 보유하고 좋은 차도 여러 대 가지고 있다.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진 친구인데 내게 호주에 이민할 고민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가족들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본인은 지금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도피성 이민을 준비한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사는 위치만 다르지 가지고 있는 고민은 나와 같았다. 통장에 수십억의 현금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내 동생은 여의도에 있는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기업 본사의 경영기획실에서 일하는데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아직 서른셋밖에 되지 않아서 남들보다 비교적 빠른 진급이다. 유학생인 나와는 다르게 국내에서 공부한 동생은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입사했고 중간에 이직을 한번 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잘 쌓아왔다.
졸업 후 쉼 없이 달려온 동생은 이번 겨울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1년간 신혼여행으로 세계 일주를 떠나겠다고 양가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개방적이신 우리 부모님은 동생의 계획에 찬성하며 응원을 보내셨다. 나는 지난 시간 동안 잘 쌓아온 커리어를 이렇게 한순간 내려놓는 그의 용기가 부러웠다. 매일 지하철 9호선을 타고 하루하루 기계처럼 살아가는 그에게도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고국에서 2주간의 꿈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한국에 두고 혼자 밴쿠버로 돌아왔다. 밴쿠버 국제공항에 도착해 게이트를 나와 입국장을 걸어가는데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해서 주어진 레인쿠버(rain-couver) 라는 별명에 걸맞게 밴쿠버의 하늘은 회색 잿빛을 한 채 땅을 적시고 있었다. 세 식구에게는 좁은 방 한 칸짜리 아파트가 넓게 느껴지고 딸아이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거실에 적막함이 흘러온다.
다음날 바로 출근했다. 고작 2주를 비웠는데 500통이 넘는 이메일이 쌓여있다. 회의에 참여하고 밀린 일들을 하나하나 기계처럼 다시 해나갔다. 2주 전 한국행 비행기에서 삶의 돌파구를 찾아보겠다며 많은 생각에 잠겼던 것이 무색하게, 아무 일 없었던 것, 마냥 다시 내 삶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내 안에 문득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지금 행복하니?’
10년 전 캠퍼스에서 나와 월 300불짜리 방 한 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 박봉의 월급에도 이민을 지원해 주는 회사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환경이었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달려왔다. 영주권이 나오고 연봉을 배로 주는 회사에 들어갔다. 여전히 업무 환경은 밤낮 주말을 가릴 것 없는 유통회사였지만 더 많아진 급여와 영주권으로 인해 얻은 안정적인 신분에 감사했다. 대출받아 지금 사는 작은 아파트 한 칸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다 지금 일하는 회사로 이직하면서 비교적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이 생겼다. 연봉은 또다시 배가 되었고 아파트도 더 넓은 곳을 분양받아 완공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좋은 삶을 살고 있고 심지어 결혼해서 예쁜 딸도 생겼지만, 월 300불짜리 단칸방의 삶보다 더 행복해졌냐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는 삶이 되었다.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 인가 아무 감정 없이 목적지를 잃은 채 초점 없이 그저 달려온 것이다. 그동안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면서 얻은 성취감을 통해 감사와 행복을 느껴왔다면 지금은 그저 다른 이들의 삶이 부럽고 불안한 미래에 근심하고 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치열한 삶의 전투 속에서 40대를 향해 달려가는 초보 가장에게 숙제 하나가 주어졌다.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와 같은 숙제를 받아 놓고는 도피를 고민하는 30대 아저씨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그다음 또 찾아오는 더 큰 난이도의 문제들을 풀어 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