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시간
버킷리스트는 대학생 때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대학생 때는 배낭여행 가기, 가고 싶은 회사에서 일해보기, 자격증 따기, 친구들과의 좋은 시간 보내기 등 그렇게 거창하진 않은 소소한 몇 가지만을 정했을 뿐이었다. 아니, 아마 당시의 나에게는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일 것이다. 나를 그렇게 터치하지 않았던 부모님 덕일까 남들 다하는 컴활이나 영어 시험, 공무원 시험 준비는 안 하고, 그냥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경험들을 최대한 해보려고 했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건 직접 해봐야 된다고. 내가 뭐라 해도 안 들릴 거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라고 좀 해주시지 싶기도 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스스로 나를 잡는 방법들을 일찍 깨우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진짜 어른이 되고 나서는 내가 이 사회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버킷으로 정해야 할지, 아무 생각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 할지 도통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내가 생각한 미래는 지금 내 팀장님처럼 되는 게 아니었고, 경쟁을 부추기는 회사 분위기, 의지할 수 없는 동료들은 나를 병들어가게 했다. 어떻게든 성과를 내곤 있었지만 나의 모습이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퇴사를 하기 전에도 하고 싶은 게 뚜렷하진 않았지만, 이건 확실했다. '내가 교통사고라도 나서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면?' 아무 애정이 없는 회사를 꾸역꾸역 다녔던 것을 가장 후회할 것 같았다. 언제 갖게 될지 모르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재테크 공부를 하고, 파이프 라인을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지금 하면 안 될까?'라는 질문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 이곳을 떠난다고 해서 내가 앞으로 일할 곳이 없진 않을 것 같았고, 당장 생활이 가능한 벌이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냥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갔다. 회사 밖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지만, 더 이상 후회하고 있는 내 모습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나는 쉴 틈 없이 달려온 편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냥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랑 시간을 보내는 시간. 멀리 여행을 갈까도 했지만, 뭔가 도피성 여행인 것 같아서 근처에 좋아하는 공간들을 찾아다니며,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적어둔 계획들을 해나갔다. 내가 해온 일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1~2달이 흘러갔던 것 같다.
그렇게 몇 개월 보내니 4개월 차에는 한 팀에 소속이 되어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인 소개로 면접을 보기도 하고, 회사의 공고들을 보긴 했지만 아직 더 혼자 시간을 보내라는 하늘의 뜻인지 잘되진 않았다. 그렇게 1~2 달은 아는 인사담당자에게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점검을 받으면서 내가 해온 일들을 또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의 나는 다시 잘 맞는 팀으로 들어가서 재밌게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거기에 집중했다. 나는 혼자 하기보다는 한 팀에서 여러 명과 일을 해야 효율이 나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2주 전에 버킷리스트를 가볍게 적어보았다. 새로 가는 회사에서 해보고 싶은 일들과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을 먼저 적고 있었다. 새로 가는 회사는 열린 사람들과 다양한 기회가 있다는 큰 장점이 있는 곳이다. 당분간은 장점에 집중해서 회사에 잘 적응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로는 '내 공간 만들기'를 적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카페가 아닌 그냥 공간이었다. 어떤 공간으로 풀어갈진 2주 전까지만 해도 뚜렷하지 않았는데, 다른 버킷리스트를 2주 동안 하면서 뚜렷해졌다. 다른 버킷리스트는 가보고 싶었던 공간을 혼자 다녀오기였는데, 나중에 근처에 가면 가봐야지 했던 곳들을 목표가 생기니 귀찮아도 어떻게든 가고 있었다.
방문해서 좋았던 곳들은 좋은 책들과 차분해지는 음악, 세심한 배려가 있는 곳들이었다. 잠깐 숨을 돌리고,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는 책들을 오롯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곳. 또 공간에 함께 있는 사람들과 묘한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곳. 잠시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곳들이었다.
하고 싶은 게 많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버킷리스트를 100개나 적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매년 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가치들과 할 것들을 정리해 온 편이라 잘 연결시켜 보면 되겠다 싶었고, 버킷리스트를 일, 관계, 공간, 도전 등과 같은 9가지의 카테고리로 정리할 수 있었다.
큰 틀에서 정리를 하고 나니 100개의 리스트를 좀 더 쉽게 적어볼 수 있었다. 앞에 말한 것처럼 적었던 리스트 중에 무의식적으로 먼저 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계속 미뤄둔 것이었는데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니..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또 예전부터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 오던 것들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이 버킷리스트를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