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건축 여행 #02 유니테 다비타시옹
중학교 때 처음 만난 나의 친구 K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다. 그녀가 졸업과제를 마친 주에 우리는 함께 프랑스 도시 세 곳을 경유하는 여행을 떠났다. 우리의 스물아홉 살을 기념하고 K의 프랑스 생활을 마무리하는 여행이었다. 파리 - 마르세유 - 아를. 그녀의 커다란 이민가방을 끌고 함께한 그 여행을 생각하면 특히 마르세유의 바삭한 햇볕 아래 눈에 담았던 이국적인 풍경이 떠오르면서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짙은 파란색 지중해와 해변의 보트들, 에어컨이 없는 꼭대기층의 숙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노을. 내게 마르세유가 특별한 이유는 이런 남프랑스의 인상뿐 아니라 실내건축을 전공한 K의 소개로 함께 방문했던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최초의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과 마주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마르세유는 유색인종 비율이 높고, 항구도시 특유의 거친 기질 때문인지 꽤 위험한 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다행히도 우리는 운이 좋았고, 친절한 사람들과 미소를 교환하는 멋진 여행을 경험했다. 가방 조심하라고 일러주던 택시기사 아저씨부터 선물이라며 비스킷을 건네주던 멋진 빵집 아저씨, 피에스타 시간을 알지 못해 헛걸음할뻔한 우리에게 특별히 가게 문을 열어준 슈퍼마켓 아주머니처럼 특별히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기념비적 건물에 가는 방법은 지하철과 버스 모두 이용가능했는데,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밖에 보이는 사람 사는 동네를 좀 더 눈에 담기로 했다. 엄마 품에 안겨 버스를 탄 아이가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하고 우리를 바라보았고 주변의 몇 명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현지 사람들과 훅 가까워진 듯한 느슨한 분위기에 행복감을 느꼈다. 버스에서 내려 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를 밟고 서자 육중하고 큰 건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건물이 꽤나 커서 바로 앞에서는 건물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문 쪽의 작은 광장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과는 달리 크고 단단해 보이는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육중한 건물의 첫인상은 마치 산 위에 커다란 배를 옮겨둔 듯이 이질적이기도 하고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건물 입구로 들어가자 로비가 나왔다. 알록달록한 유인물이 붙은 아파트 게시판에서 생활감이 느껴졌다. 오래되었지만 잘 관리되고 있는 건물 특유의 닳음이 정겹게 느껴졌다. 관광객에게 공개된 층을 구경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호텔 방문자들이 조식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보였다. 우아한 라인의 조명과 어두운 색으로으로 이루어진 묵직한 공간에 자연광이 비추는 레스토랑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복도의 조도는 어두웠고 천장은 낮았다. 퍼블릭하게 공개된 층이라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들은 실거주보다는 주로 사무실이나 소품을 파는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현관문은 칸딘스키가 연상되는 강렬한 원색으로 집집마다 다르게 칠해져 있었다. 우울한 편지라도 왠지 힘을 내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에너제틱한 노란 우편함도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과감한 색을 써도 촌스럽지 않을까. 내게는 없는 컬러 감각이 유럽인의 DNA에 탑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특유의 것이라 생각해 온 빛바랜 아름다움이 도처에 가득한 그곳에서 오래된 것을 지키고 닳은 채로 인정하는 그들의 가치관이 피부로 느껴졌다.
채광이 좋은 체육관 벽에는 인체비율이 여러 개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단순한 벽화는 아니라는 생각에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후에 코르뷔지에에 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인체비율 이야기가 언급되곤 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이론을 시각화한 벽화로, 모듈러 이론이란 사람의 인체비율을 토대로 공간을 설계하여 생활하기에 편리한 사용자 중심의 설계를 지향하는 방법론이다.
집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일어선 상태로 야채를 썰거나 냄비의 수프를 젓는 동작을 하기에 안정적인 높이가 싱크대 상판의 높이가 된다. 마찬가지로 일어서서 만세를 한 손 높이를 기준으로 천장의 높이를 얼마나 높게 해야 하는지 정할 수 있고, 앉은 키를 기준으로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을 디자인할 수 있다. 생활할 때 불편함이 없도록 사용자의 편리함에 중심에 두고 건축물을 설계하고자 했다는 것. 디자인업에 종사하면서 놓칠 수 없는 키워드인 사용자 중심이라는 개념을 1950년 즈음에 건축에 적용하고자 한 사례인지라 의미 있게 다가왔다.
알고보면 더 유익하겠지만 코르뷔지에의 근대건축의 5원칙이나, 모듈러 같은 이론적인 개념을 모른 채로 건물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그 공간에 즐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방문 당시 아무 정보 없이 방문했던 나도 공간의 비율과 컬러가 다채로워 머무는 내내 즐거웠다. 사실 마감은 러프하다 못해 원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세심한 일본 기술자들이 보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을 위해 지어졌다. 한 건물에 주거와 함께 상업시설, 커뮤니티 시설까지 갖춘 나름의 도시를,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로서의 르 코르뷔제가 자신이 생각한 유토피아를 하나의 건물로 설계한 것이다. 모든 혁신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지만 형태적 측면에서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현대식 아파트의 전신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집집마다의 교류가 없고 아파트끼리도 구역을 구분 짓는 울타리를 치고 있어 점차 폐쇄적이 되어가는 한국의 아파트를 떠올리니 한편으로 씁쓸해졌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시대적으로 복잡한 시기에 지어졌음에도 주민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설과 열린 대지를 통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인본주의적인 공간을 추구했다. 어쩌면 서로를 돕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공동 육아, 공동 여가, (사생활은 보호되는) 공동생활공간은 아니었을지 상상해 본다.
내부를 둘러보고 유치원과 수영장이 있었던 옥상정원에 올라 바다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마르세유 외곽의 호젓한 풍경을 눈에 담는다. 시원한 풍경에 마음이 트인다. 마치 큰 배의 갑판에 서 있는 것처럼.
코르뷔지에는 크루즈 여행을 즐겨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크루즈라는 건 날짜 맞추기도 어렵고 항구까지 가야만 승선할 수 있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테니 언제나 원할 때 올라타서 시원한 공기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크루즈선을 대지 위에 지어둔 것 같기도 하다. 프랑스, 일본, 인도 등 세계 각지에 남긴 17개의 건축물이 모두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전설적인 건축가인 그에게도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날이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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