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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레몬 Dec 13. 2024

십이월과 일월 사이에 있는 달의 이름은 무엇일까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46번 시 중


"십이월과 일월 사이에 있는 달의 이름은 무엇일까?" 십이월과 일월 사이에 있는 달? 없다. 없는 것을 네루다는 있다고 하니 이름 하나 만들어보자고 설익은 생각과 상상을 부른다. 이 질문은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46번 시 첫째 연이다. 한 해가 접혀가는 즈음에 어울리는 네루다의 질문이다.


<질문의 책> 46번 시의 전문은 이러하다.

그리고 십이월과 일월 사이에 있는 달의 이름은 무엇일까?

무슨 권한으로 사람들은 포도송이의 열두 알을 셀까?

왜 일 년 내내 계속되는 좀 더 긴 달을 우리한테 주지 않았을까?

봄은 꽃피지 않는 키스로 당신을 속인 적이 없는가?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그만의 상상력으로 인간과 자연과 사물을 바라본 관점이 <질문의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46번 시의 첫째 연과 행이기도 한 이 질문은 계속되는 질문들과 유기적으로 엮여있다. <질문의 책> 시들은 모두 이런 형식이다.

실하고 탐스러운 포도송이 열두 알을 셀 수 있는 것도 어떠한 권한으로 주어진 것인지, 권한 부여를 한 주체는 열두 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왜 허락하지 않았는지, 낙심하지 않고 봄을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는 희망을 의심한 적은 없는지, 위험한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그의 내면의 질문이 우리에게 흘러와 묻는다.


달력은 한 해를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낸다. 세상은 열두 개 달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그 배열을 조화롭게 받아들이며 일 년을 살고, 할 수 있으면 더 연장하고 싶은 한 해를 보내면서 희망이 속인 봄을 계속 기다려야 하는 심정을 네루다는 46번의 시로 표현한다.

십이월과 일월 사이에 없는 달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며 가장 보이지 않는 '틈'과 '여백'의 메타포를 지니고 있다.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닌, 그러나 둘 사이를 연결하는 이름 없는 순간의 달.

이 시간을 <가장자리 월>이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고 싶다.


교육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J. 파머 (Parker J. Pamer)는 그의 저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가장자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의 바깥쪽 경계에 가까운 부분을 일컫는다. 파커 J. 파머는 중심과 주변의 경계, 안과 밖의 가장자리에서 진정한 삶의 깊이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가장자리는 중심이 아니다. 가장자리는 경계이지만, 단절이 아닌 연결을 의미한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파커 J. 파머 지음 >


십이월의 시간은 '마무리'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일월의 시간은 '시작'이라는 무게로 우리를 압박한다. 그러나 그 사이인 가장자리의 시간은 누구도 성취를 강요하지 않고, 누구도 실패를 묻지 않는다. 오직 당신만의 속도로 숨을 고르고, 멈추어서 새롭게 준비하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시간. 숫자도, 목표도 없이 오직 흐릿한 여백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온전한 나로 가장 자유로운 시간 말이다.




< 김환기. 9-XII-71 #216. 푸른 점과 선들. 127 x 251cm.  1971년작. by  CHRISTIE'S IMAGES LTD. 2024 >



화가 김환기의 <푸른 점과 선들> 작품은 점과 선이 얽히고 이어지는 순간을 닮았다. 푸른 점 하나가 푸른 여백 속에서 선이 되고, 그 선은 다른 점과 이어지며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작품 속의 푸른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닌 가능성의 공간이고, 새로운 연결이 만들어지는 자리다.


십이월과 일월 사이의 달은 달력에 없지만, 우리 내면에는 늘 <가장자리 월>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

달력의 숫자 사이에 놓인 여백처럼, 매 순간을 채우지 못한 빈칸에서 삶은 조용히 자란다. 우리는 그 틈에서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이어가는 법을 배우고,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한다.


2024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마지막과 시작 사이가 너무 짧아서 진심으로 <가장자리 월>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나와 너와 우리에게 닿아 있는 공동체의 큰 시련으로부터 가장 작은 점인 나에게로 시선을 좁히면 여전히 시간과 공간의 틈에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가장자리 같은 경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포도송이 열두 알을 세고,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희망이 속일지라도 따스한 봄을 기다리고 낙심하지 않는다.

눈물을 닦고 구부린 등과 무릎을 세워 웅크린 곳에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가장자리   /  mocalemon



몸을 낮추면 보일거야


낡은 담장 구석에 핀 겨울 풀

길가에 도열하는 개미

그늘진 돌 밑 공벌레


머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몸짓들


높이와 속도에 집중하면

낮이와 깊이를 잊는다지


잠시 멈추어도 돼

괜찮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중심 잡느라 잔뜩 힘이 들어간

허리와 목과 다리를 풀고

귀 기울여 봐


너의 안과 밖에는

얼마나 작고 연약한 것들이

살려고 힘을 내는지


무릎을 꿇고 등을 구부리면


얼마나 하찮은 것들이

세상을 붙잡고 있는지





질문 속에 피어나는 아포리즘

가장자리의 고요가 세상의 속도를 떠받치고 있다

The silence at the edges is supporting

the speed of the world


내가 만드는 아포리즘

[                                          ]





* 정현종 선생님의 번역에는 "그리고 십이월과 일월 사이에 있는 달의 이름은 무엇일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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