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퇴직의 재구성

삶을 짓는 문장 16

by 모카레몬 Feb 12. 2025



간절함은 반드시 길을 만든다
 
Earnest desire
will always carve a way



점 한 개, 두 개, 세 개가 모여 선이 되고, 선이 사방으로 모여 면이 됩니다.

면이 모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는 입체를, 입체는 구조와 공간을 만듭니다.

앞을 보다가 뒤를 보게 되고, 오른쪽과 왼쪽을 지나 위와 아래를 봅니다.

방향을 찾고, 입구와 출구를 탐색하지요.

결국 높은 곳에 오르면 낮은 곳에서 볼 수 없던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영월댁 친할머니는 바느질이나 성경책을 보실 때, 돋보기 안경을 씁니다.

바늘귀가 클 때는 실을 잘 꿰지만, 바늘구멍이 작아질수록 삼 남매의 도움을 받으세요.

셋째 막둥이는 그게 너무 귀찮아서, 처음부터 실을 길~게 잘라 꿰어드립니다.

그럴수록 실이 더 엉켜서 자주 꿰어 드려야 하죠.

잔꾀를 부리면 자기가 당한다는 걸, 셋째에게 배웠습니다.


할머니는 가끔 색실로 수를 놓으세요.

박음질, 홈질, 감침질로 이불 바느질을 하시지만, 수를 놓을 땐 기교를 부리십니다.

기법의 전문 용어는 몰라도 매우 섬세한 바느질을 하셨어요.

촘촘한 매듭을 10개 정도 모아 놓으면, 암술과 수술이 있는 꽃심이 됩니다.

바늘과 실이 천을 오가는 동안 꽃잎, 꽃받침, 줄기, 잎, 나비, 풀이 새겨집니다.

가끔 굴뚝에서 연기 나는 집 장식을 더하세요.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고, 면이 모인 형태를 만드신 거죠.

아버지는 수틀에서 천을 떼어 부라더 미싱으로 앞치마를 완성하십니다.

어머니는 그 앞치마를 명절이나 제를 지낼 때 사용하셨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래된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다 보니 남아 있는 물건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가족이 그 부분을 가장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었던 물건들을 얘기하면서 말예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점을 찍듯 공부하고, 선을 잇듯 관계를 맺으며 사회라는 넓은 면위에 서보려고 노력했어요.

작은 성취와 실패를 반복하며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갔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또 다른 형체를 짓기 시작했지요.

책임이라는 선을 그리고, 사랑이라는 모양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늘 저의 자리와 의미를 고민하며 살았어요.

하지만, 완성된 무늬는 없습니다.

이룬 것도 없고, 이루었다 함도 없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삶의 형태를 창조한 저만의 형상으로

지금, 여기에 실존하고 있습니다.


퇴직 후의 삶은 다시 새로운 점을 찍는 과정입니다.

출근하지 않는 아침, 익숙했던 길을 가지 않는 하루는 매우 낯설었지요.

차츰 새로운 점들이 보였습니다.

묵혀 둔 글들과 버리지 못한 시집을 다시 꺼내고, 이끌어 주실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아주 우연히 만나서, 선처럼 이어진 관계입니다.

시를 새롭게 배우고, 쓰고, 읽는데 동기와 힘을 얻습니다.


더불어 브런치는 인생 후반에 펼쳐진 운동장이자 놀이터로 선물 받은 공간이에요.

그저 구경하는 참관자가 아니라, 직접 뛰어놀면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창조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늘 규칙과 약속이 있는 조직 속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터를 벗어나,

좀 더 능동적인 삶을 창조하는 현재의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많아?"

"믿는 구석이 있지?"

"월급 안 받아도 살 만하지 않아?"

"불려 둔 창고가 있어?"

"돈이 돈을 벌게 해두었구나!"


퇴직 전에 선후배와 친구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입니다.

대부분 경제적 여유를 물어왔지요.

40대의 퇴직은 저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꿈의 간절함보다는 당면한 과업을 해내며 살았으니까요.

힘든 일도 많았지만, 기쁨과 즐거움도 커서 정년퇴직을 꿈꾸기도 했어요.

50을 훌쩍 넘기고 이제는 멈추고 싶었습니다.


소망하는 꿈을 향한 간절함에 늘 목말라 있었고,

질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서 퇴직을 결정했습니다.

결단이 없었다면, 주저하고 망설였을테죠.

간절함이 클 때는 선택과 결정이 어렵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힘의 원칙은 더 큰 힘이 항상 이기는 겁니다.

저에겐 간절함이 매우 컸습니다.


인생은 정해진 선을 따라 흐르지 않네요.

삶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미완성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오늘도 점을 찍습니다.

이 점들이 모여 언젠가는 또 다른 무늬를 만들겠지요.

새롭게 그려지는 무늬가 내일을 그려나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며, 면이 형체를 만들고, 형체는 입체로 확장됩니다.

입체가 쌓여 구조가 되고, 구조는 다시 공간을 창조하지요.


삶도 마찬가지라고 여깁니다.

내가 있는 공간에서 오늘을 살고, 또 다른 점을 찍습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 하고, 꾸준히 창조하는 과정을 즐기고 싶어요.

끝없는 확장 속에서 내일을 바라보며, 저 너머의 꿈을 향해 나아갑니다.


저의 점과 누군가의 점이 선으로 이어지고, 함께 더 넓은 면을 만들거라 여겨요.

제2, 제3의 면이 쌓여 따뜻한 형체가 되고 구조가 세워지면 그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곁의 따스한 풍경이 되어 줄 겁니다.


훗날,

생을 내려다 본다면 낮은 곳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전망을 볼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글벗이 되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퇴직 #꿈 #간절함 #돈 #미래 #길

이전 16화 잣대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