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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키팍 May 08. 2020

단단해지는 5월, 1편 어린이날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단단히도 쌓아놓은 5월이구나

5월 5일 어린이 날. 대한민국 어린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날인데,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어린이 인지 어른인지 상관없이 어린이날은 어린이날 다운 기분으로 들뜬다. 석가탄신일부터 5.1일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까지 연속되는 휴일. 초록이 밀고 올라는 오는 새싹처럼 휴일이 퐁당퐁당 돋아나니 5월은 얼굴에도 꽃이 핀다.

선물을 사야 할 걱정도 없고, 데리고 나가 놀아야 할 아이도 없으니 혼자 놀기에 딱 좋은 날이다. 계획도 다 짰다. 푸른 잔디에 올라 맘껏 공을 칠 것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린다. 소풍 가는 마음으로 이동 거리와 시간을 알아두고 간식도 챙겼다. 어른이가 되어 누리는 5월 5일이 이처럼 기대되니 내가 어린이인지 어른이인지.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마음은 어리지! 그렇지'. 어린 마음이 단단해진 5월을 펴본다.

 

아버지는 밭에 가시고, 어머니는 어느 집에 일을 가시고 없다. 봄이 되어 불을 안 땐 지 오래되어 지난겨울 따뜻했던 집안은 봄 햇살 운동장보다 서늘했다. - 지금에서 생각해 보니 집안에 아무도 없기에 서늘했는지 모른다 - 빈집에 들어가 책가방을 마루 한쪽에 던져두고 다시 운동화를 끼여 신는다. 쟁였던 신발끈을 풀고 다시 쌔게 매니 흙먼지가 올라와 콧등에 내려앉는다. 한 바탕 재채기로 콧등 먼지를 날려 버리고 창고에서 딱지 상자를 꺼내 들고 대문 밖으로 뛰었다. 딱지판은 동네 입구 전봇대 아래에서 저녁까지 펼쳐진다. 얼마나 쳤을까. 전봇대에 매달린 가로등이 눈을 깜빡인다. 퇴근하는 친구 아버지들이 지나가면 고개를 들어 빼꿈이 인사했다. 이쯤되면 딱지판도 끝날 시간이다.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대왕 딱지를 따내려 했다. 하나 둘 이름을 부루는 아주머니들 목소리에 아이들이 사라졌다. 커다랗게 탑이 된 딱지 상자를 들고 반쯤 매달려 있는 철 대문을 향해 낑낑되며 걷는다. 어깻죽지가 뻐근하다. 그 길에 고기 굽는 냄새와 생선 굽는 냄새가 담장을 넘어온다. 담장 넘어가 보이지 않아도 먼지 쌓인 눈가에는 밥상이 보였다. 그래서 궁금해하지 않았다.


TV를 켜고 한참 만화에 빠져 있으니 어머니가 오셨다. 어둠이 다 내리고 전봇대마저 사라진 다음 가로등 밑에서 아버지가 긴 그림자를 달고 오셨다. 마루에 서서 보면 처음에는 그림자가 작았다가 점점 길어지는 게 보이는데, 아버지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길어져 단번에 알아챘다. 그림자가 너무 천천히 길어지거나 비틀거리면 내가 나가서 아버지를 붙잡았다. 밥을 먹고 씻고 잤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린이 날이라 학교를 안 가도 된다니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가 일 나가는 소리는 새벽에 들었고, 어머니는 마당에서 불을 때며 빨래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오줌을 놓고 대문 밖에 나가 애들이 나왔나 쳐다봤다. 전봇대만 다시 나타났다. 고양이 한 마리가 생선 냄새 넘어온 담장을 어슬렁 걸어간다. 어느 집에선가 개가 짖는다. 비스듬히 보이는 옆집에 현관문이 열리더니 그 집 식구들이 나온다. 아저씨가 앞에 타고 아줌마 옆에 탄다. 뒤에 그 집 애들 둘이 뒤에 탄다. 타기 전에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이라 인사를 못했다. 자가용이 출발한다. 차 꽁무니가 전봇대 아래 딱지판 밟고 사라진다. 며칠 뒤 그 아주머니가 그날 어디 놀러 갔다가 돼지갈비를 먹고 왔는데, 갈비 양념이 어떠했다며 집에서도 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어머니 옆에서 들었다. 침을 삼켰다.


그 날은 어린이 날이었다. 우리는 외식도 없고 선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 그냥 그런 학교 안 가는 날이었다. 형들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도 그랬다.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친구들은 그날 아버지 차에 올라타 놀러 갔다가 외식을 했다지만 우리 집은 그냥 그런 날이었다. 그때는 차도 없었고 아버지는 그날도 일을 나가셨다. 부모님에게 휴일이란 건 없었다. 우리도 어린이날이 서운하지 않았다. 3월에 연달아 있는 삼 형제 생일도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은 게 다였던 터라 어린이날 역시 대수롭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투정을 했으면 큰 형한테 주먹과 발로 밟혔을 것이다. 그게 무서워서 그랬는지, 진짜 아무 기대도 없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5월 5일이 찍힌 가족사진 하나 없는 거 보면 후자가 맞을 것이다. 갈비는 조금 먹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 정도를 못 참을 나이가 아니었고 부모님을 조를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우리 형제가 언제, 몇 살부터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큰 형은 맞이만큼, 둘째 형은 큰형만큼, 나는 둘째 형만큼 단단히 어린이날들을 보냈다.


사십 대의 어른이 시각으로 보면 어린이 날들은 이렇게 단단했다. 형들은 어떠했을까. 지금 딸들을 키우고 있는 형들은 오늘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하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면 바로 끊어 버릴 것 같아 전화는 못 들겠다. 형제들의 대화란 게 건조하니 물어보나 마나다. 부모님은 어떠실까. 아버지는 하늘에서 자식들보다 손주들 어린이날을 못 챙기신 게 여간 서운해하시지 않을까 싶다. 왜 그때 그렇게 밖에 못 했는지 서운해하실지. 사는 게 바빠 어쩔 수 없었는지 한 번 들어는 보고 싶다. 그렇게 라도 해야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못다 한 사랑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힘들고 괴롭고 아플 때는 울고 이야기하고 터는 게 약이니까. 마흔이 넘은 아들이 노모에게 무심코 빨래하던 어린이날이 기억나시나며 묻는다면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쌓인 아픔을 이제야 털지 않을까 싶다. 노모의 눈물이면 어쩌랴. 고약하게 고기 굽는 냄새가 넘나들던 담장을 이참에 무너트리는 게 어린이날 답지 않을까.  


새벽에 일어나 오전에 신나게 공을 치고 자가용 몰아 어머니 집에 갔다. 상추로 겉절이를 하고 삼겹살을 구워 내셨다. 밥 한 그릇 비우고 앉아있자니 눈꺼풀이 무겁고 나른해져 누웠버렸다. 어머니가 베개를 베어 주신다. 어머니도 옆에 누우셨다. 고개를 돌려 어머니 얼굴을 보니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손과 팔을 만져보니 부으셨는지 누렇고 단단하다. 벌써부터 피부가 타셨나. 아침에 밭에 갔다 왔더니 대간하다고 하신다. 두어 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서울 갈 채비를 하는데 뭔가를 바리바리 싸신다. 차문을 열고 나서 어머니 손을 잡고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셔요?"

"오늘이 뭐야. 몰라"

"오늘 어린이날이잖아요"

"그래"

"우리 어렸을 때, 어린이날 뭐 했어요? 그때 뭐 놀러 가고 그런 거 했나요?"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이었는지, 무거웠다.

"하긴 뭘 해. 아무것도 안 했어. 하하하."


기다렸던 대답은 아니었다. 무엇을 바랐든 어머니는 여전히 단단하게 어린이날을 보내셨다. 차에 올라 유리창을 내리자, "다음에 올 때 맛있는 고등어 사와라" 하신다.

자동차가 전봇대 밑 딱지판을 밟고 출발했다. 노란 가로등이 손을 흔드는 어머니 머리 위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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