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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영 May 18. 2024

기타를 좋아하는 할머니로
늙고 싶어

마흔엔튜닝_사십대 북에디터의 기타 분투키

[도도서가 = 북에디터 정선영] 몇 주 전 레슨 때 일이다. 기타 줄을 쥔 손끝이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느라 하얗게 질렸고, 이윽고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기타 선생님은 눈앞에 놓인 튜닝기를 가리키며 “잡아보세요” 했다. 튜닝기 집게 부분을 손가락 힘으로 벌려보라는 뜻이다. 엄지와 검지는 집게 벌리기를 통과하고 이어 중지로 넘어가자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엄지와 약지로 집게를 집자 단 0.1mm도 벌리지 못했다. 새끼손가락으로 넘어가자 집게는 꿈쩍할 기미도 안 보였다. 


이럴 수가…. 나 이렇게도 연약한 사람이었나. 300 페이지 신국판 책 스무 권쯤은 번쩍번쩍 드는 사람인데. “아니 선생님, 잠깐만요. 이게 무슨 일이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렇게도 손가락 힘이 없을 줄이야. 이러니 소리가 안 나죠. 총체적 난국이네요.”

소리가 제대로 안 나는 것도 문제지만, 이대로는 살짝 맛을 본 태핑이라는 주법도 절대 불가능했다. 우선 나는 한 주 동안 튜닝기 집게로 악력을 길러보기로 했다. 


그날 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 힘으로 컴퓨터 타자는 어떻게 치냐”던 선생님 말은 그냥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타인의 타자 소리에 민감한 나는 ‘나부터 그러지 말자’ 싶어 키보드를 살살 치는 편이다. 오랜 세월 굳어진 습관이 하나하나 쌓여 이렇게 기타를 배울 때 방해가 되고 있다니.  


자질 문제는 그 자체로 예체능에서 넘기 힘든 큰 벽이다. 나는 평소 습관 때문에 힘쓰는 방법마저 모른다. 피부는 약하고 탄력도 없다. 손은 작은 데다 손끝에 살이 없다. 줄 닿는 면적이라도 넓힐 요량으로 손톱도 최대한 바짝 자르고 있는데, 큰 소용이 없는 듯하다. 여러모로 애초에 기타를 치기에 적합한 손은 아닌 것이다. 

굳은살은 생겼다 벗겨지기를 반복한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 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기타를 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해서다. 덕분에 작고 뭉툭한 손은 점점 투박해지고 있다. 


하루는 늦은 밤 하소연을 들어주던 친구는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냥 기타를 하지 마.”


<파리의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의 시간들>라는 다큐 영화가 있다. 제목 그대로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의 인생사를 담아냈다. 2차 세계대전 전 베를린에서 일본인 어머니와 스웨덴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헤밍은 일본에서 자랐지만 오랜 시간 무국적자로 살며 가난과 차별, 청력 상실 등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예순이 넘어서야 정식 데뷔를 할 수 있었고, 여든이 넘은 현재까지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하고 있다.


영화는 헤밍의 손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한다. 피아니스트 손이란 무릇 희고 가늘고 길어야 한다는 내 편견을 보란 듯이 짓밟은, 크고 뭉뚝하며 단단한 장수의 손이다. 헤밍은 영화에서 자신의 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보다 2배는 두껍다. 이 손으로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피아노를 잘 모르는 나는, 두꺼운 손이 피아노를 치기에 적합한지 아닌지 모른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고 그것을 강점으로 승화시키는 그녀가 멋져 보였다. 

기타를 치기에 적합한 손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언젠가 작고 투박한 그렇지만 꽤나 단단한 손을 가진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할머니가 되고 싶다면 큰 바람일까. 적어도 기타를 좋아하는 할머니로 늙고 싶다.



-매주 토요일 <마이데일리> 연재 중

https://www.mydaily.co.kr/page/view/202308091134134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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