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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소 Jun 04. 2018

[파키스탄] 2018.05 이슬라마바드에 갔다.2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

유스호스텔에서의 생활은  생각이상으로 즐거웠다. 모든 유스호스텔의 직원들은 조금이지만 영어를 할 줄 알았고, 호스텔에 머무르는 학생들을 시끄럽지만 밝았다.


   조식시간이 아침 8시부터 10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식당으로 갔다. 유스호스텔은 전 세계 어디나 비슷한 구조인지, 꼭 15년 전 중학교 때 수련회를 온 기분이었다. 긴 테이블이 3개 놓여있는 테이블에 앉아있으니 꼭 급식을 먹는 기분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프라타 (짜파티를 기름을 많이 넣고 튀긴 음식, 파키스탄 사람들이 오믈렛과 짜이와 함께 아침으로 주로 먹는다.)와 오믈렛 그리고 짜이가 내 앞에 놓였다. 어제 제대로 먹지 못해서 아침 일찍 식당이 문을 열자마자 아침을 먹으러 온 것인데, 시간을 잘못 맞춘 것인가? 새벽부터 화장실에 모여 분주하게 화장을 하고 있던 여학생들은 없고, 이곳에 있었는지도 모를 남학생들만 식당으로 밀려들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방어벽이라도 처진 듯 내 맞은편, 옆자리, 그리고 대각선 자리까지 내 근처에는 아무도 오지도 않고, 남학생들이 멀리서 수근 대는 소리만 들렸다. 허허... 오늘도 미묘한 기분을 만끽하고 내게 꽂히는 시선을 느끼며, 프라타(납작하게 생긴 튀긴 밀가루 빵)를 손으로 찢는데, 드디어 누군가가 내 앞(정확히는 대각선)에 앉았다. 인사를 하고 시선을 거두지 않으니, 앞에 앉은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고 아마도 선생님일 것 같은)남자는 옆에 서있던 다른 학생에게 다그치듯 무엇인가를 말했고, 그 남학생은 식당을 나갔다. 그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키가 180m는 넘을 정도로 키가 큰 다른 남자가 등장했다.


"니하오"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인사를 건냈다.


"니하오. 그런데 저 중국사람 아니에요. 한국에서 왔어요."


알고 보니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이 고등학생들의 인솔선생님이며, 내가 중국인이라 생각해 중국어교사를 다른 학생에게 데려오라 한 것이었다. 이 미묘하게 핀트가 안 맞는 배려에  뭐라고 응답해야 할까? 거기다 이 선생님이 남학생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못하도록 다그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인데... 정말 이 미묘한 배려를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남학생들은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떠났다. 나는 마지막까지 식당에 남아 오믈렛에 박혀 있다가 파헤쳐진 양파 무더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는 나와 같은 구역에 숙박한 여학생들이 밀려들어왔다. 새벽부터 열심히 꾸민 보람이 있는 듯 다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분명 오늘 아침에는 부스스한 머리에 반쯤 감긴 눈이었는데, 열정적인 쉐딩으로 발그레한 볼과, 각잡힌 머리, 그리고 강렬한 아이라인까지 생겼다. 아침부터 공들인 보람이 내게도 느껴지는 것 같다. 이 학생들은 서로 다른 학교에서 8~10명씩 서로 다른 지역,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들로 이슬라마바드에서 대학 입학 관련 특강을 들으러 왔다고 했다.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움직이던 엉덩이가 다시 의자에 붙었지만, 나는 다시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야 했다. 오늘 밤 훈자로 떠나는 버스표를 구입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환하게 웃어주는 친절한 유스호스텔 매니저에게 버스터미널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매니저는 유스호스텔에서 걸어서 10분정도 떨어진 곳에서 101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매니저가 일러준 방향으로 10분쯤을 망설임 없고 당찬 발걸음으로 걸어가자 이슬라마바드가 계획도시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떡하니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10분쯤 기다렸을까? 빨간 글씨로 101이라고 적힌 버스가 도착했다. 사실 버스 자체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오래된 시내버스였고, 목적지를 말하면 수금원이 돈을 걷으러 다니는 이 지역 전형적인 운영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새로웠던 것은 버스에 남/녀 자리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버스의 앞쪽 두 줄 정도는 여성, 나머지 뒷자리는 전부 남성의 자리다. 나는 아무생각 없이 비어 있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내 옆자리에 슬쩍 엉덩이를 들이밀었고, 그는 버스 수금원과 다른 버스의 남자들에게 쓴소리를 한바가지 들은 뒤 맨 뒷자리로 들어갔다.


피르와다이버스 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하여 무사히 버스티켓을 구입하고, 이제 다시 무사히 호스텔로 돌아오는 일만 남았다. 무난하게 아무런 사건 없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내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대뜸 전화번호를 요구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사실 어제 라호르에서 이슬라마바드로 오는 버스에서도 갑자기 아무런 대화도 없이 대뜸 전화번호를 달라는 무슬림여성들이 있었다. 버스가 휴게실에 정차한 사이 화장실에 갔다. 그런데 화장실 입구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이 아니가. 남녀노소 없이 쳐다보는 시선에는 이미 익숙한 지라 크게 신경쓰지 않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화장실 입구 에서 나를 계속 주시하던 여자가 대뜸 내게 핸드폰을 내밀며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버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무슬림 여성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할 무렵에 나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고,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 와중에 또 다른 두 명의 무슬림여성이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마치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페이스북 친구’가 되자고 하거나, 인도에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받는 것 같은 느낌인지라 별 거부감 없이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달랐다. 영어도 전혀 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갑자기 휴대폰은 내 앞으로 내밀더니 대뜸, “넘버!!!”라고 말한 것이다. 전화번호를 찍어드리고 나니, 별 말 없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악수를 청하고는 다시 뒤 돌아보는 일 없이 그대로 버스에서 내렸다.


  



호스텔로 돌아오니 왁자지껄하던 아침과는 달리 고양이 두 마리만이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체크아웃을 했다. 어제 나와 비슷한 시간에 이곳에 도착해 같은 구역에 있었던  십여 명의 여학생들의 방도 모두 텅텅 비어있었다. 아마도 학생들은 특강을 듣고 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것 같다. 훈자로 가는 버스는 오후 6시에 출발한다. 이곳에서 여유있게 4시에 출발한다 하더라도 아직 5시간 이상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스텔 매니저에게 몇 시간만 더 있어도 되겠냐고 물으니,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버스를 타러 가라고 말한다. 어제만 해도 43도의 지글거리는 도미토리의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가는 선풍기 아래 있다가, 오늘은 시원하고 한적한 호스텔에 홀로 누워 있으니 지금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 확신 없는 몽롱한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멍하니 누워있다 거의 잠에 빠질 무렵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어제 나의 방황의 장본인인 A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몇 시에 버스에요?" A는 다짜고짜 버스 시간을 물었다.


"6시요."


"그럼 제가 데려다 줄께요. 5시에 출발하면 될 꺼에요."


"아니요.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안돼요. 저에게는 당신이 훈자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돌볼 의무가 있어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정말로 괜찮아요. 버스나 택시타고 가면 되요."


나의 필사적인 거부에도 불구하고 A는 3시30분에 유스호스텔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일하는 <메리어트 호텔>은 유스호스텔에서 고작 십분 거리에 있었고. 그는 오전 11시 부터 오후3시까지 근무를 하고 4시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뒤 오후 7시부터 오후11까지 근무를 한다고 했다. 기가 막히게도 내가 버스를 타러 가는 시간이 그의 휴식 시간과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A는 멀미 때문에 점심을 거르겠다는 나에게 그래서는 먼 길을 갈 수 없다며, 치킨코르마를 권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앞에는 치킨코르마가 등장하고 한번 먹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전부 먹어버렸다. 극구 사양하던사람이 접시를 핧아 먹을 기세로 마지막 짜파티 조각으로 접시에 뭍은 양념까지 빡빡 닦아 가며 먹은 것이 민망하긴 했지만... 너무 맛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음식은 죄가 없고, 그 음식을 즐긴 사람 역시 죄가 없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나의 여행운이 이슬라마바드까지 이어지지 않은 걸로 볼 수 있으나, 아직 운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A와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 승차거부를 당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배도 부르고 편안한 방법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한 나에게 생길 수 있는 가장 불운한 일은 단 하나 뿐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단 하나의 불운을 멋지게 낚아챘다. 그렇다. 나는 훈자에 가는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정확히는 버스 탑승을 거부당했다. 버스기사와 NATCO 직원은 내 비자가 유효하지 않은 비자라고 말하며 나를 버스에 태워 줄 수 없다고 했다.


나의 파키스탄 비자 만료일은 4월 30일 이었다. 그리고 내가 파키스탄에 입국한 것이 4월 30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키스탄 비자의 여행기간은 입국한 그 날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3개월짜리 비자는 4월30일 부터 3개월 동안 유효한 것이다. 하지만 NATCO 직원은 내 비자가 이미 만료된 것이고, 대사관에 방문해 비자를 연장하지 않으면 나를 버스에 태워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사람들은 저마다 이 일에 참견하며 한마디씩 의견을 내는 통에 도무지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곤란한 것은 이곳에 있는 모든 무슬림남자들이 내가 아닌 A에게 우르드어(파키스탄의 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나는 A의 통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버스기사의 말이 몇 일전에 당신과 같은 비자를 가지고 훈자로 향했던 2명의 중국인과 1명의 일본인이 있었는데, 세 사람모두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요. 특히 중국인 2명은 군인들에게 어딘가로 끌려가서 2일 뒤에 풀려났다고 해요. 이런 위험을 감수 하면서도 오늘 버스를 탈 생각이에요? 아니면, 제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요. 친구가 외국인비자를 담당하는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어서 하루에 2~3번은 각국대사관을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호텔에도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직원이 따로 있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곳에 하루 더 있으면서 비자문제를 확실하게 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A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이야기 했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 훈자로 떠나고 싶었다.


"아니요. 그래도 저는 오늘 이 버스를 타고 훈자로 갈 거에요."


나는 그대로 버스에 오르려 했지만 아직까지도 버스기사와 직원은 나를 버스 탑승구를 막는 것 같은 모습을 취하며 나를 버스에 태워주지 않으려 했고, 한쪽에서는 짐을 버스위로 올리기 위한 사다리를 치워버렸다.


"혹시 NOC(No Objection Certificate, 출입허가증)이 있어요? NOC를 가지고 있다면 버스를 태워줄 수 있다고 하네요." A가 말했다.


"아니요. 없어요. 하지만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훈자로 가는데 NOC가 필요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제 비자는 완전히 합법해요. 비자를 받을 때 한국에 있는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분위기는 점점 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6시에 출발해야 하는 버스는 나 때문에 7시가 다 되도록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고, 주변에서 한마디씩 끼어들며 무슨 일인지를 묻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에게 너무 위험하니 훈자로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특히나 "군인한테 끌려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파키스탄이에요."라고 말하는 A의 말에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은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럼 먼저 한국대사관에서 비자를 확인해 볼께요." 결국 나는 마음을 돌렸다.


사실 이때는 내가 제대로 생각할 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정말로 내 비자가 이미 만료된 것이라면 나는 파키스탄에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많이 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불법체류자들이 며칠 동안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본국으로 강제송환 되는 장면이 계속해서 재생 됬다.


"잘 생각했어요. 티켓 가지고 있죠? 저 주세요. 환불해야죠."


A가 나의 훈자행 버스티켓을 가지고 환불을 요구하자 갑자기 버스기사는 태도를 바꾸어, 환불을 해줄 수는 없으니 버스에 타라고 말했다. 갑작스런 버스기사의 태도 변화에 나는 더욱 불안해 졌다.


"당신 비자가 이상한 것이니 티켓은 환불해 줄 수 없어요. 그냥 버스에 타요. 하지만 당신이 중간에 돌아오거나 억류되더라도 나는 책임질 수 없어요."


나는 아직 붕괴된 정신을 제자리로 돌리지 못하고 있었고, 한시라도 빨리 대사관에 연락해서 내 비자를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버스티켓을 환불하는 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A는 어째서인지 내 티켓 환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항상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던 A가 언성을 높이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나는 서둘러 A를 말렸다.


"괜찮아요. 버스티켓 환불 못 받아도 되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빨리 돌아가서 비자를 확인하고 싶어요."


A와 다시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에 대해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아요. 걱정 말아요. 내가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당장 당신 비자문제를 해결 할께요. 그리고 내일 친구들이랑 가서 티켓도 환불 받아요."


A의 말은 고맙지만 나에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설마 정말 사용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던,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받은, 가방 속 여권지갑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명함 말이다.


"그런데 사실 저한테 한국파키스탄 대사관 비자발급 부서에 있는 사람의 연락처가 있어요. 제안은 고맙지만,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것보다 이 사람에게 연락하면 이 문제를 더욱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우선 <메리어트 호텔>에 가요. 사실 지금 제 근무시간이 이미 시작됐어요.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대사관사람한테도 연락하고, 친구들한테도 연락해서 전부 해결할 수 있어요."


"아니에요. 제가 그냥 혼자해결 할 수 있어요. 호스텔로 돌아가서 한국대사관에 연락하면 되요. 정말로 더 도와주지 않아도 되요"


A는 내말을 듣기는 했는지 택시는 <메리어트 호텔>로 들어갔고, 나는 커다랗고 더러운 배낭과 먼지투성이의 옷을 입고서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반짝이고, 새까만 정장과, 전통의상과 반짝이는 쥬얼리로 몸을 감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메리어트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서 A을 기다리게 됐다.




내가 대체 왜 이곳에 이런 차림으로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홀로 스프라이트 한잔 앞에 놓고 훈자에서 온 레스토랑 직원들과 훈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하염없이 A를 기다리고 있으니 점점 짜증과 화가 밀려왔다. 사실 이곳에서 유스호스텔은 차로 10분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에, 호텔 주차장에 도착한 즉시 (이미 시작은 오후8시를 넘었지만) 호스텔로 가려고 했다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A는 이 호텔은 이슬라마바드에서 가장 빠른 와이파이를 가진 곳 중 하나라는 말을 해주었고 한국의 서기관에게 보이스톡을 하기 위해서는 빠른 와이파이가 가장 최우선 이었다(유심 4G데이터를 사용 할 때는 갑작스럽게 보이스톡이 끊기곤 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와이파이를 연결하자마자 내가 서기관에게 전화를 하려 하니, A는 한사코 자신이 이 통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A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에게 여유시간이 생길 때 까지 기다리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파키스탄 보다 4시간이 빠른 한국은 이미 날이 바뀌어 있었다. 밤12시가 넘은 시간에 바로 보이스톡 연결을 하는 것은 너무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 생각하여, 카카오톡을 먼저 보내려 했더니 A는 무슬림은 먼저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며 바로 통화를 연결하려 했고, 나는 그럼 이슬라마바드의 부인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내 아이폰을 그대로 뺏어가듯이 가져간 A는 마치 자신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 듯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서기관의 부인과 통화를 하고 한국에 있는 서기관과도 통화를 했다. 비서관에게 비자 사진을 보내 내 비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거기다 훈자에 가는데는 NOC가 필요 없고, 특히나 NATCO버스를 탄다면 버스표를 살 때 비자를 확인하고, 이 버스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버스이기 때문에 승객을 훈자까지 데리고 갈 의무가 있다는 서기관의 말을 A가 전해 주었다. 서기관의 친절한 설명에 마음이 놓였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A가 서기관과 통화를 할 때 는 분명 영어로 대화를 했는데, 우르두어가 아니라 영어라면 A보다 조금이라도 영어를 더 잘하는 내가 통화를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인데,(더군다나 이건 내 문제다) A는 중간에 나에게 전화를 바꾸려 하지 않고, 스피커폰으로도 소리를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비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마주쳐서 그런지 비자를 확인한 순간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이곳 시간으로도 밤10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혼자서 택시를 타는 것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메리어트 호텔>에 들어온 순간부터 A는 자신이 유스호스텔까지 데려다 준다고 말 했기에, 나는 그의 일이 끝나는 밤11시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A는 근무가 끝나고 나를 유스호스텔에 데려다 줬고, 내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에 빵과 주스를 내 방문에 걸어놓고 갔다. 그리고 내일 NATCO본사에 전화해서 티켓을 환불해 주겠다는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나 몰래 문에 걸어놓은 빵 뿐만 아니라 A는 내가 레스토랑에서 기다리는 내내 자신이 저녁을 사겠다고 말했지만 식욕도 없었고, A가 자꾸 내게 돈을 쓰는 것에 꺼림 직한 기분이 들어 거절했다. 물론 그의 이런 호의와 도움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마냥 귀찮거나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고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슬림에게 손님은 ‘신의 사자’다. 무슬림은 친구가 집을 방문하면 양말과 팬티까지 손수 빨아서 가방에 넣어 줄 정도로 손님대접에 지극정성이다. 또한 친구가 자신을 방문하면서 드는 모든 비용도 지불한다고 한다. 손님은 그냥 친구가 있는 장소에 도착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자꾸 여기저기 끌려 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이제 그냥 혼자서 늘 지내던 대로 지내고 싶어 티켓은 신경 쓰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안돼요. 마지막 까지 당신을 돕는 것이 저의 의무에요. 내일 9시까지 호스텔로 갈께요.“나는 A에게 절대 오지 말 것을 당부하고, A가 계속 내일보자는 말을 하는 와중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실랑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A는 정말 아침 9시에 유스호스텔에 왔다. 정확히는 유스호스텔에서 5분쯤 떨어진 시장으로 나를 나오라고 불렀다. 작은 가게에 앉아 망고주스를 마시면서 그는 미리 찾아온 전화번호로 NATCO사무소에 전화를 했고, 결국 이슬라마바드(라왈핀디) 사무소 소장과 통화를 해서 내 티켓을 환불해 줄 것을 확답 받았다.


소장은 내 티켓을 버스터미널 티켓 창구로 가지고 가면, 오늘 오후6시에 출발하는 티켓으로 교환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았다. 정말 훈자로 가는 일만 남았다. 갑자기 어제 밤에 A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조금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A는 오늘 오전 근무가 없으니 같이 아침을 먹자고 말했고, 나는 A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할 겸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커튼으로 둘러쳐진 식당의 한 구석에서 아침부터 치킨코르마를 먹었다. 오늘도 치킨코르마는 맛있었다.


A와 (내가 생각하기에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유스호스텔로 돌았다. 그런데 유스호스텔 매니저와 어떤 남자가 유스호스텔 문 앞에서 조금 심각한 얼굴로 서서 나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던 지라, 심각한 분위기 임에도 불구하고 광대가 솟을 대로 솟은 얼굴로 반갑게 인사했다.


"어제 훈자로 간다고 했다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매니저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 이었고, 나는 그제야 광대를 꾹꾹 눌러 내리며 매니저와 남자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이야기 했다. 매니저와 함께 있던 남자는, 어제 그리고 그제 나를 이곳에 데려다준 남자에 대해 물었다. 나는 A가 나를 도와준 것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말했다.


"어제 정확하게 당신을 버스에 못 타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매니저와 함께 있던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버스기사랑, NATCO 직원이요. 저한테 직접 제가 버스에 탈 수 없는 이유를 말한 건 아니고, A가 제게 통역을 해주었어요."


"A라는 남자를 조심하세요."


"네?"


"비자하고 여권 보여줄 수 있어요?"


"여기요. 그런데 이미 대사관에 확인했어요. 제 비자에는 문제가 없어요."


"내 생각에는 저 남자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이슬라마바드에 묶어두려고 일을 꾸민 것 같아요."


"무슨 말이에요?"


"저는 길기트에서 관광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에요. 지금 정부에서 훈자로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 하고 있는데, NATCO 버스 기사가 외국인 탑승을 거부했다니 믿기질 않는 걸요? 내 생각에는 저 A가라는 남자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거에요."


관광청 공무원이라는 남자의 진지한 태도에 잠시 어제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되짚어 봤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내가 A와 함께 있으니 사람들은 내가 아닌 A와만 대화를 했다. 대부분의 대화는 우르두어로 진행되었고, 나는 A을 통해서 상황을 전달받았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도 간단한 말만이 돌아왔고, 긴 대화는 나를 거치지 않았다. 사실 파키스탄이건 어디건 이슬람이건 다른 종교건 상대적으로 여자의 발언권이 없는 나라에서, 한국인이든 현지인이든 다른 외국인이든 남자와 함께 있으면 나는 순식간에 투명 인간으로 변했다. 내가 혼자 다니는 이유 중 하나도, 이 투명 인간이 되는 순간이 밥상을 뒤엎을 만큼 싫어서 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A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나를 거짓으로 휘두르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A가 내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이 없다. 실제로 지금도 A는 나 때문에 자신의 시간과 돈은 소모하고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내가 무사히 훈자에 도착할 때 A가 느낄 뿌듯함 정도다. 부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A을 만난 순간부터 은연중에 A가 원하는대로 일이 흘러간 느낌이 없진 않다. 그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무엇을 증명하려 한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아무리 거절해도 그는 자신이 내 대신 '훈자버스'에 관련된 일을 처리하길 원했다. 의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아니면 당장 A에게 전화해서 관광청 공무원의 이야기를 전할지도 몰랐다.


"조언 감사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조심'하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를 도와주려 노력한 것은 사실이고, 어찌됐건 나는 하루가 늦어졌지만 훈자에 가게 되었으니, 적어도 오늘은 ‘A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저 남자를 조심하세요."라는 남자의 말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고 버스티켓도 교환했다. 오늘은 일부로 A가 근무하는 시간에 유스호스텔을 나섰다. 버스가 출발할 때 까지는 아직 2시간이 넘는 시간이 남았다.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NATCO직원이 부매니저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따라갔다. 부매니저는 어제 내가 버스에 타지 못하게 한 그 남자였다.


 


"어제 당신이 가지 않는다고 하고서는 이렇게 하는게 어디 있어요?"


아침 사무장과의 통화에서 A는 사무장이 나를 버스에 타지 못하게 한 버스기사와 사무장에게 징계를 내리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사무장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부매니저의 이런 말을 들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당신이 내 친구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니에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분명 당시에게 버스에 타라고 했는데, 당신이 버스에 타길 거부했어요."


"그건 버스티켓을 환불해 달라고 말한 뒤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그렇게 말한 것이고, 그전까지는 나를 버스에 태울 수 없다고 말했잖아요."


부매니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어찌 됐건 어제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고, 내가 NATCO버스를 이용하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과 함께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부매니저가 사무장에게 어떤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유스호스텔의 남자의 말처럼 A가 어제 나에게 거짓으로 통역을 해준 것인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확실한건 내게 말을 하는 내내 부매니저의 표정이 굉장히 억울해 보였다는 것이다.


1시간쯤 더 지나자 이번에는 라왈핀디 NATCO 매니저 사무실에서 나를 불렀다. 매니저는 별다른 말없이 "불편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으면 함께 하시겠어요?"라고 말했고, 나는 멀미를 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다시한번 매니저가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갑자기 마음이 무겁다. A가 대체 사무장에게 무슨이야기를 했길래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어렵게 대하는 것일까?


6시가 되기 30분전 부매니저가 나를 다시 불렀다. 그는 나에게 6시 훈자로 가는 버스 대신 10시에 길기트로 가는 버스를 타기를 권했다. 10시에 길기트로 가는 버스에는 많은 가족들이 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혼자 가기에 불안함이 없을 것이고, 10시 버스를 타면 검문소를 아침에 지나게 되기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수 있지만, 6시 버스를 타면 검문소를 새벽에 지나기 때문에 중간 중간 피곤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4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 대기실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져 4시간쯤 더 기다리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임이 확실했고, 내 버스시간을 바꾼 것이 부매니저의 생각이든 매니저의 생각이든 나를 그렇게 어렵게 대하던 그들이 내게 나쁜 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러겠다 말했다. 부매니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짜이를 한잔 배달시켜 주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 벌써 4잔째의 짜이였다.




자, 이슬라마바드에서 나의 행적을 보면 내가 왜 <될.놈.될>인 것인지에 의문이 생길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나는 <될.놈.될>이다. 아무리 흑역사라 할지언정, 한때의 진지산 소망이었던 외국인이라고는 단 한명도 볼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아마 이곳에 온 여행자는 아직까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슬라마바드의 근교 마을을 방문해 봤고, 5성 호텔에서 4시간 가까이 와이파이를 쓰며 한가하게 있어봤다. 버스표와 비자 문제로 ‘문제는 생기면 생길수록, 고생은 하면 할수록 즐겁다’는 나의 약간 기괴한 성향에도 아주 잘 들어맞는 경험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기트로 가는 버스를 5시간 동안 함께 기다리고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한 사람들과의 인연이 길기트에서는 물론 이슬라마바드를 떠난지 1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곳 훈자에서 까지 이어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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