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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카토 May 13. 2024

뭉쳐야 산다-1874년 첫 인상주의

0512@Musee d'Orsay

토마 쿠튀르 <로마인의 타락>

        그들이 가장 잘한 건 뭉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르세 미술관 중심에 자리 잡은, 쿠튀르 Couture의 대작, <로마인의 타락>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는가. 뭉치지 않았다면 굳건한 살롱 Salon의 전통도, 앵그르 Ingres를 통해 내려오는 예술학교 보자르(Beaux-Arts)의 가르침도 거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의 주인공이 된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 오르세 미술관에선 특별한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파리 1874, 인상주의의 발명>.

나다르 스튜디오, 카퓌신 거리 35번지

바로 사진작가 나다르 Nadar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첫 번째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를 다시 한 자리에 모아놓은 전시다. 관람객들은 150년 전 파리지앵이 감상했던 그대로, 붉은 벽에 걸린 르누아르 Renoir와 드가 Degas 등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탄생 150주년이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인상주의의 시작이 된 전시가 바로 1874년의 첫 전시다. (물론 화가들은 그전부터 ‘인상주의’ 그림을 그렸겠지만) 모네 Monet 나 르누아르는 고전주의 작가의 화풍을 배웠지만, 그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따를 마음이 별로 없었다. 물론 고전주의 그림을 잘 그릴 재능도 부족한 편이었다. 당시 화가로 성공하려면 살롱전 입선이 필수적이었다.

프랑스 미술의 전통, 살롱전의 풍경

살롱은 국가가 후원하는 전시회로 예술학교 출신 심사위원들이 전시작과 대상작을 고르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인상주의 그룹은 살롱전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직접 선정한 작품을 따로 전시하기로 했다. 그들은 심사위원도, 대상 선정도 없는, 자유로운 전시회를 꿈꿨다. 이를 통해 기존의 미술 사조와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찾고자 했다.



르누아르, <피라지앵>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르누아르가 그린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 <파리지앵>이다. 당대 유행을 잘 반영한 파리지앵의 모습을 담았는데, 배경도 드레스의 채색도 아직 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하던, 순간의 포착이었을 터.

모네, <카퓌신 거리>

모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나다르의 스튜디오 위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카퓌신 Capucine거리>를 그렸다. 거리 위 인물들은 모두 형태가 뭉개져 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개념을 그리는 대신, 실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 위한 야심 찬 시도였다.

그렇게 모네는 인상주의 전시회의 색깔을 평론가들에게 확실히 보여줬다. 드가의 새로움은 표현 방식보다는 구도에 있었다. 발레 공연장이 아닌 무대 뒷모습을 그린 것도 특이한데, 인물의 배치도 불균형적이다.

에드가 드가 <발레 리허설>

때론 인물의 모습이 프레임 밖으로 잘려 나가거나, 뒷모습이 그림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를 통해 드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 대신,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을 확보했다.     



첫 인상주의 전시회 전시 목록

        물론 첫 행사가 늘 그렇듯,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정교한 전시는 아녔다. 목소리가 큰 모네와 르누아르를 중심으로, 드가와 모리조 Morisot, 피사로 Pissarro, 시슬리 Sisley 그리고 세잔 Cezanne 등이 첫 전시회에 참여했지만, 인상주의와 별 관련이 없는 화가들도 자신의 조각과 작품을 출품했다. (총 36명이 참여했다) 살롱전 입선이 쉽지 않은 화가들, 자기 작품 노출을 늘려 어떻게든 좀 더 수익을 내려던 화가들이었다. 우리가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는 마네 Manet 같은 경우는, 드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전시회 참가를 거부했다. 살롱전 입선을 희망했던 마네의 눈에 인상주의 전시회는 패배자들의 자조 섞인 모임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인상주의 전시를 거부하고 살롱전에 참가했지만, 마네는 낙선했다.

마네의 낙선작, <오페라 극장에서읙 가면 무도회>

마네는 제도 밖이 아닌, 안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마네에 대한 경배를 초상화로 표현했던 또 다른 화가 팡탕 라투르 Fantin-Latour 역시 인상주의 전시회 대신 살롱전에 참여했다. 첫 전시회였던 만큼 인상주의 전시회는 비주류의 느낌이 그만큼 더 강했다.



아구스트 랑송 <전선에서의 사망>

        인상주의 전시회는 개최 타이밍이 좋았다. 전시 개최 4년 전인 1870년,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한국이 U-23 아시아 축구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와 8강에서 진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비스마르크가 총리였다고 해도,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체급부터가 다른 나라였으니, 프랑스 처지에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전쟁의 폐허를 복원하며 지금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그랑 파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상주의 전시회는 거대한 권위의 붕괴-전쟁에서의 패배-와 새로운 시대로 전환-오스만 남작의 도시 재건-이 맞물린 시기에 등장한 셈이다.

낙선전의 히트작 혹은 문제작, 마네 <올랭피아>

여기에 전쟁으로 건물이 파괴돼, 살롱전을 열 대규모 공간이 부족해졌고, 그로 인해 전시작 수가 크게 줄어들게 됐다. 이에 화가들은 반발했다. 나폴레옹 3세는 대안으로 낙선전, 즉 아깝게 떨어진 작품을 별도의 공간에서 전시했는데, 의외로 낙선전이 인기가 많았다. 살롱전 보다 더 많은 관람객이 낙선전에 모일 정도였다. 미술 소비자들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징후였다.


        인상주의 기획전이 흥미로운 건 인상주의 전시가 열린 바로 그해에 입선한 살롱전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첫 인상주의 전시가 열리고 2주 뒤 살롱전이 열렸다. 즉, 지금은 비주류가 된, 하지만 당대의 주류였던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솔직히 인상적인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앵그르나 쿠튀르의 작품보다는 조악하고, 인상주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밋밋하다. 고전주의 작품들의 아류 같은 느낌이랄까. 달력 그림 느낌이 강하다.

1874년 살롱전 출품작1
1874년 살롱전 출품작2

물론 당대 미술 애호가들의 생각은 달랐겠지만, 당시의 비주류였던 인상주의가 지금은 절대적인 주류가 됐으니, 1874년 살롱전 작품이 현대인의 시선을 사로잡긴 쉽지 않아 보인다. 당시 살롱에 전시하는 게 성공의 징표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결국 후대에 이름을 남긴 건 살롱전에도 들어가지 못한 패배자들이다.



        물론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 전시에서 그림을 제대로 판 화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상주의 화가들의 실력도 더 발전했고, 화가이자 부자였던, 인상주의 작가들의 후원가, 카유보트 Caillebotte의 풍족한 자산이 인상주의 그룹에 더해지며, 세 번째 열린 인상주의 전시는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카유보트는 안 팔리던 인상주의 작가들의 그림을 다른 이름으로 남몰래 대량 구매한 인물)

카유보트, <페인트 칠하는 사람> 카유보트의 작품은 인상주의 보다 사실주의에 좀 더 가깝다

이때 전시됐던 그림 대부분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저기서 보아왔던 그림들이다.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니 당연히 기획전의 한 공간을 유명한 인상주의 작품들로 채웠다. 하이라이트는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만든 모네의 <인상, 일출>.

모네, <인상;일출>

자기 고향 르아브르 Le Havre의 산업화한 항구를 그린 작품이다. 물론 모네는 자신이 그린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출품을 위해 제목을 정해야 했을 때, ‘인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세잔, <모던 올랭피아>

        전시회에서 가장 튀는 작품은 세잔의 그림, <모던 올랭피아>다.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된 세잔의 작품을 보면 한눈에 세잔이 인상주의 그룹과 다른 결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존 전통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저항적인 마음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참가한 것인데,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된 세잔의 작품은 인상주의 동료들에게조차 조롱받았다고 한다.

낙선전에서 대형 스캔들을 일으켰던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물론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현대적이라고 옹호할 수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전시에 녹아들지 못한 작품이란 건 분명해 보인다. (이 그림 옆에 걸려있던 모리조의 차분한 작품 <요람> 때문에 더 조악해 보였을 수도)

베르트 모리조, <요람>

세잔은 세 번째 전시에도 참여했는데, 이때 출품한 그림에 대한 반응은 아주 좋았고, 심지어 꽤 비싼 가격에 팔렸다. 세잔으로선 낯선 경험을 한 셈이다. <모던 올랭피아>는 어떤 인상주의 그림보다 형체가 뭉개져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가 뭉개버린 대상의 형체를 지켜내고 싶어 했다.

세잔, <오베르쉬아즈, 목맨 사람의 집>

세 번째 전시에 참여한 작품은 그런 세잔의 예술가적 목표가 엿보이며, 결국 세잔이 인상주의와 결별하고 자기 고향 엑상프로방스 Aix-en-Provence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그림이다.



        성공한 예술가의 출발을 훔쳐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인상주의는 가장 성공한 미술 사조이자 운동이다. 정체성 불분명한 이름의 사조들, 후기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가 등장했던 것도 인상주의가 얼마나 성공한 미술 운동이었는지 보여준다.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선 인상주의의 테두리 안에 어떻게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1874년 전시회가 열릴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무명이었으며, 자신의 그림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을 때였다. 그래서 그들은 뭉쳤고, 서로의 불안을 토닥여 줬으며,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미술 사조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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