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강해 보여도 아닐 수도 있다.
영화 촬영현장 및 프로덕션에서 여자로서 일하려면
보통은 목소리가 높고 강단이 있으며
사람을 다룰 줄 아는 강한 사람들만 봐왔었다.
아마도 이 험한 프로덕션 광야에서 살아남은
프로듀서들의 모습이 대개는 그런 거니까
물론 부드러우면서 자상한 프로듀서들을 본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장부 같은 스타일의 프로듀서들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나의 롤모델처럼 나도 여자 프로듀서로서
이 바닥에 살아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자 프로듀서들도 머리를 빡빡하게 밀고
까다로운 민머리가 있는 반면
조곤조곤 일하면서도 디테일을 잡아주고
혼내지 않으면서도 일 잘하는 프로듀서들도 있었다.
까다로운 상사랑만 일하다가 이런 부드러운 팀을 만난 건
나한테는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 두 보스는 모두 민머리이시다.
아마도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다들 치열해서
머리가 빠지는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워낙에 스트레스가 많고 매일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뻥뻥 터지는 게 촬영현장이니까.
얼마 전에 노조에서 연락받았는데 누군가가
촬영장에서 떨어져 돌아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사고 배우(알렉 볼드윈)가 쏜 총에
촬영감독이 사망하는 사건도 너무나 가슴 아픈 소식이다.
이렇듯 촬영현장은 늘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스트레스 요인들이 많다.
아무튼 내가 본 여자 프로듀서들은 하나같이
여장부 스타일이지만 다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도 현장에서 이렇게 건재하는 모습을 보면
그 존재자체가 힘이 되고 격려가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들 여장부 같고
씩씩하고 강단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만난 상사 중에서 유리멘탈을 가진 상사도 있었는데
스트레스를 분해를 못하는 사람 같았다.
조금만 일이 몰려오고 그 일들을 소화하기가 버거우면
눈물부터 났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쉽게 긴장하고 불안해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농담도
혹시라고 불편했을까 봐 부연설명을 마다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우는 날이 가끔 있었다.
나도 내가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
나는 그래도 덜 예민한 거구나 싶었다.
물론 나도 정신없이 바쁘고 일이 몰려와
밥도 못 먹고 일한 날에 주저앉아서 울었던 적이 있다.
너무 정신없이 바쁜데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었던 거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들이 맨날 있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만난 지 2 달인가 됐을 때쯤
벌써 이런 Mental breakdown을 두세 번은 본 것 같다.
같은 사무실을 쓰고 함께 일하는 거라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고 이런 날은 나도 같이 기분이 꿀꿀해진다.
의연하게 내가 할 일들을 하지만
문을 닫고 훌쩍이고 있으면 참 신경이 쓰인다.
모두들 강해 보여도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듀서도 쫑파티 당일
예약한 장소 근처에서 총기사고가 나는 바람에
길을 통제해 버려서 스텝들이 쫑파티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혼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우린 늘 약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난 이 프로덕션일이 더 좋은 거 같다.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각자의 역량대로 달란트 대로 힘을 합쳐서
무엇인가를 창작해 내고 만들어 가는 일
그래서 의미 있게 느껴진다.
때로는 내가 이 거대한 공장의
하나의 부품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너무 혼자 다 하려고
애쓰고 발버둥 치지 않으려고 한다.
자꾸 현장이 그리워지는 걸 보니
이제 슬슬 복귀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